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와 바른 삼위일체론  
 


서언

기독교 교리 가운데 삼위일체론은 일반적으로 이해가 거의 불가능한 극난한 교리로 알려져 있다. 한국교회의 성도들 가운데 삼위일체론을 바르게 아는 사람들은 매우 적고, 많은 이들은 삼위일체론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아서 포기하기도 한다. 삼위일체론은 정말로 이해가 안 되는 그런 극난한 교리일까? 삼위일체론이 이해가 안 되기 때문에 한국교회 안에는 이단적으로 보이는 잘못된 삼위일체론이 활개를 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삼위일체론은 성서에 근거가 없고, 교회가 발전시킨 사변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셋이 하나가 되고 하나가 셋이 되는 그런 신관이 성서 안에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먼저 밝혀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다”라고 고백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고후 5:19)라고 전한 바울의 메시지가 삼위일체론이라는 점이다.1) 사람들이 삼위일체론을 성서와 관계 없는 고대교회의 사변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언가 삼위일체론을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위일체론이 이해가 안 되는 극난한 교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삼위일체론을 무언가 잘못 알고 있다. 삼위일체론은 사변도 아니고 이해가 안 되는 극난한 어떤 교리도 아니다. 단지 우리에게 삼위일체론이 무언가 잘못 왜곡되어 전달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삼위일체론이 무엇이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삼위일체의 정통신조인 니케아 - 콘스탄티노플 신조(381년)를 설명하면서 시작하고자 한다.

Ⅰ. 니케아 - 콘스탄티노플(381년) 신조와 정통 삼위일체론

니케아 -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사도신조를 능가하는 권위를 지닌, 2000년 기독교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신조로, 또한 가장 정통적인 신조로 꼽히는 신조이다. 이 신조가 사도신조를 능가하는 권위를 지니는 이유는 사도신조는 동방 정교회가 인정하지 않는 서방교회만의 신조인데 반해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동서교회가 공히 가장 귀중한 정통신조로 인정하는 에큐메니칼 신조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 안에는 사도신조만 널리 알려져 있을 뿐, 정통신조 가운데 정통신조인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가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상당한 비극이며 바른 신학적 판단에 어떤 결함을 야기시킬 수 있는 가능성과 연계될 수 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무엇이 정통인가 이단인가를 판별하는 결정적 표준이고, 어떤 교회가 바른 신앙 위에 서 있는지를 규정지을 수 있는 결정적 권위를 가진 신조이다. 한국 장로교회 안에 널리 알려져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일부 장로교회의 신조로서 전 세계 교회라는 큰 시각에서 볼 때는 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와는 그 권위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특별히 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일명 삼위일체 신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삼위일체론 연구에 있어서 결정적 시금석을 제공하는 신조인데, 이 신조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는 것은 바른 삼위일체론 이해에 있어서 결정적인 결함을 야기시킬 수 있다.

그러면 바른 삼위일체론 이해에 결정적인 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의 신조일까? 바른 삼위일체론 연구를 위해 먼저 삼위일체론의 정통신조인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분은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신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분은 영원한 아버지로부터 나신 독생자로서 빛으로 오신 빛이시요, 참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피조된 것이 아니라 나셨기 때문에 아버지와 본질이 동일하십니다. 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습니다. 그분은 우리 인류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사,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성육신 하셔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시사, 고난을 받으시며 장사지낸바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성경대로 사흘만에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사 하늘에 오르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분은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하여 영광 가운데 재림하시고 그의 나라는 영원무궁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시고, 생명의 부여자이신 성령님을 믿습니다. 그분은 아버지로부터 나오시고, 아버지와 아들로 더불어 동일한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 성령님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습니다. 우리는 죄 사함을 위한 하나의 세례만을 인정합니다. 우리는 죽은 자들의 부활과 장차 임할 세상에서의 영생을 바라봅니다.

위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믿습니다”와 “우리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분은 … 참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참 하나님입니다” 와 “우리는 주님이시고 생명의 부여자이신 성령님을 믿습니다 그분은 …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동일한 예배와 영광을 받으십니다”라는 중요한 세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다. 즉 이 신조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것(우리는 하나님께서 한 분이라고 믿고 있다)과는 너무나도 다르게 하나님께서 세 분이심을 고백하고 있다. 이 신조의 첫째 단락은 성부이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고, 둘째 단락은 성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으로 고백하기까지는 무수한 신학적 논쟁과 이단과의 투쟁이 있었다.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는 참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께만 적용시키고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보다 열등한 어떤 존재로 보려고 했던 아리우스(Arius)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성자이시며 참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참 하나님으로 선포했다. 즉 니케아 공의회는 성부 하나님만이 영원 전부터 존재했던 유일한 하나님이라는 아리우스파의 일신론을 부정하고 성부 하나님과 똑같은 신성을 지닌 또 한 분의 하나님이신 성자가 계시고 이 성자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한 것이다.2) 381년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325년의 니케아 신조의 성자에 대한 고백을 그대로 이어받았고 이를 선포하고 있다. 325년의 니케아 신조와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신조 (니케아 신조와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합해서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라 칭한다) 사이의 중요한 차이는 성령에 대한 고백이다. 위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보면 셋째 단락에서 성령에 대해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동일한 예배와 영광을 받으십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 고백이 콘스탄티노플 신조의 독특한 고백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동일한 예배와 영광을 받는다”는 표현은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와 똑같은 권능과 위엄과 신성을 지닌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표현이다. 즉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외에 성령이신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이 성령이신 하나님은 성부나 성자에 열등한 어떤 신이 아니고 신성에 있어서 똑같은 권능과 위엄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전 세계 교회에서 가장 권위 있는 정통 신조인 니케아 -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한국교회 성도들의 일반적인 믿음과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세 분이심을 선언하고 있다. 즉 성부이신 하나님이 계시고 성자이신 하나님이 계시고 성령이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선포하면서 이 세 분 하나님의 특성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이 신조는 이 세 분 하나님께서 한 분이라고 어느 곳에서도 선포하고 있지 않다. 정통 삼위일체론의 결정적인 신조인 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하나님께서 세 분이심을 강력하게 선포하고 있을 뿐 하나님께서 한 분이라고는 조그마한 암시도 주고 있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고대교회에서 일신론은 언제나 이단이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그것이 역동적 일신론이든 양태론적 일신론이든 일신론은 언제나 이단이었고3) 기독교의 정통신앙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다.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끊임없이 도전해 오고 정통신앙을 위태롭게 했던 일신론 이단을 물리치고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시는 세 분 하나님이심을 만천하에 공포한 신조였던 것이다.

Ⅱ. 하나의 본질(우시아)과 세 실체(휘포스타시스)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

325년의 니케아 신조와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신조 사이에 362년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회의에서 고대교회의 삼위일체론의 초석을 놓은 중요한 항목이 결정되는데 기본도식은 “하나의 본질(우시아)과 세 실체(휘포스타시스)”였다.4) 이 기본 도식에서 “휘포스타시스”라는 희랍어는 개체를 뜻하는 말인데 곧 하나님은 세 분이시라는 말이었다. 362년의 알렉산드리아 회의는 하나님께서 세 분이라는 데 조금도 의심이 없었다. 그러면 “우시아”라는 말은 무엇일까? 이 “우시아”라는 말은 본질(nature)을 뜻하는 말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본질이 같은, 즉 동일한 신성을 지닌 하나님이라는 말이었다. 362년의 알렉산드리아 회의는 325년의 니케아 회의에서 결정된 성부와 성자 사이의 “호모우시온”(동일본질) 사상을 이어받으면서 이“호모우시온”을 성령이신 하나님께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381년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삼위일체론은 알렉산드리아 회의의 결정의 연장선상에 있는 삼위일체론이다. 즉,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시는데(세 하나님), 이 세 하나님은 동일한 신성과 위엄과 권능을 지닌 하나님이라는 것이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가 규정하는 정통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시는데 이 세 하나님은 같은 하나의 본질(우시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본질이 동일하십니다”라고 선언하고 있고, 성령이신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신성과 위엄에 있어서 동일하시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동일한 예배와 영광을 받으십니다”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동방교회의 정통신학자들의 삼위일체론은 몰트만(J. Moltmann)에 의하면 사회적 삼위일체론이었다.5) 사회적 삼위일체론이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세 하나님께서 상호간의 사귐을 통해 하나됨을 유지하는 사귐의 삼위일체론을 뜻하는 말이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배후에는 바실(Basil), 니사의 그레고리 (Gregory of Nyssa)와 나치안즈의 그레고리 (Gregory of Natianz)와 같은 위대한 신학자들이 있었다. 우리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가 있도록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배후에 있는 동방교회의 정통신학자들을 캅파도키아 교부들이라 부른다. 이 캅파도키아 교부들 가운데 맏형격인 바실은 세 분 하나님의 일체성을 세 하나님의 코이노니아(koinonia) 개념으로 표현하려고 시도했다. 나치안즈의 그레고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족형의 유비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는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귐은 지상의 인간의 가족 사이의 사귐과는 물론 무한한 차이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가장 가까운 지상적 유비는 아담-하와-셋이라는 가족이었다고 가르쳤다.6)

캅파도키아 교부들은 세 하나님의 일체성을 세 하나님이 괴상한 방식으로 한 분이 되신다는 식으로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즉, 오늘의 한국교회 성도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3=1의 교리가 고대교회에서는 삼위일체론의 초석을 놓은 캅파도키아 교부들의 머리 속에는 존재하고 있지 않았다. 또한 이 3=1의 교리는 삼위일체론의 정통신조인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속에도 존재하고 있지 않다.

Ⅲ. 페리코레시스(침투 혹은 순환)로서의 세 하나님의 하나되심

362년의 알렉산드리아 회의의 삼위일체론의 기본도식인 “하나의 본질(우시아)- 세 실체(휘포스타시스)”라는 표현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신 세 하나님은 동일한 신성과 권능을 지닌 같은 하나님이심을 선포한 신조였다. 그러면 이 세 하나님의 하나되심은 어떻게 되는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되심에 대해 결정적인 표현을 한 고대교회의 삼위일체론의 교부는 다메섹의 요한이었다.7) 요한은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시고, 이 세 하나님은 본질이 같으신 하나님이신데, 이 세 하나님은 상호 침투(페리코레시스)와 함께 하심으로 하나됨을 유지하고 계신다고 가르쳤다. 이 상호 침투(페리코레시스)와 함께 하심의 의미는 예수께서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요 14:7~11 참고)고 언급한 말씀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 성부와 성자의 하나됨은 성부가 성자이시고 성자가 성부이시기 때문이 아니라, 성자는 성부 안에 계시고, 성부는 성자와 함께 계시고 성자 안에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요한에 의하면 성부는 성자와 함께 계시고 성자 안에 계신다. 이런 까닭에 아들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고 아들이 행하시는 일은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일과 동일하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 14:11). 즉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체성의 신비는 다메섹의 요한에 의하면 성부가 성자 안에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거하시고, 또한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의 페리코레시스적 양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성부가 성자 안에 거하시는 양태는 성자와 성부가 성령 안에 거하시는 양태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라는 말의 원래의 뜻은 “윤무”라는 말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것은 무대에서 무희들이 손을 맞잡고 원형의 춤을 추는 것에서 기인된 말이다. 예컨대 남자 무용수와 여자 무용수가 손을 맞잡고 원형의 춤을 출 때 두 무용수는 사람은 분명 둘이지만 하나의 춤과 하나의 연기와 표상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부와 성자께서 만드시는 사역이 그러하다는 의미이다. 희랍의 신들은 페리코레시스적 존재가 아니었다. 희랍의 여러 신들은 상호 간의 갈등과 투쟁과 싸움으로 얼룩져 있다. 그러나 성서의 하나님은 세 하나님이시지만 그들은 사랑의 깊은 사귐으로 성부는 성자 안에 계시고, 성자는 성령 안에 계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 안에 계신다. 즉 성서의 하나님은 페리코레시스적 양태를 지닌 존재로, 독자의 길을 걷는 세 신들이 아니고 하나이신 하나님이다.

Ⅳ. 터툴리안(Tertullian)의 삼위일체 도식의 신학적 오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삼위일체의 정통적 신조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시는 세 하나님의 모습을 분명히 하고 있는 반면, 하나님께서 한 분이라는 표현은 나타나고 있지 않다. 즉, 하나님은 세 분이신데 하나로 존재한다는 것이 원래의 정통적 삼위일체론의 도식이었다.

그런데 왜 오늘날 우리들은 삼위일체론을 생각할 때 언제나 세 하나님께서 한 분이 되시는, 즉 3=1의 교리를 삼위일체론이라고 믿고 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터툴리안의 삼위일체 도식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터툴리안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언급 할 때 “한 본체(숩스탄티아)와 세 인격(페르조나)”으로 표현했다. 이 표현에서 한 본체란 말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는 말이다. 그리고 세 인격이라고 표현되고 있는 라틴어의 “페르조나(persona)”는 사실은 인격으로 번역하면 안 되는 말인데, 왜냐하면 ‘페르조나’는 터툴리안이 살던 시대에는 개체성을 지닌 한 인격체를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었고, 무대에서 배우가 어떤 역할을 할 때 그 역할을 지칭하는 표현이었다. 즉 어떤 배우가 왕으로 분장해서 왕의 역할을 할 때 그때 이 ‘페르조나’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러므로 이 ‘페르조나’는 가면이라는 말로도 번역이 가능한 단어였다. 따라서 터툴리안의 삼위일체론의 도식을 다시 번역하면 “한 본체(숩스탄티아)와 세 역할(페르조나)”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한 분이신데 세 가지 얼굴을 갖고 세 가지 역할을 한다고 한다면 이는 이미 고대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한 양태론 이단에 매우 근접하고 있는 표현이다. 사실상 터툴리안의 삼위일체론은 양태론의 매우 어두운 그림자를 느낄 수 있는, 문제가 많은 삼위일체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터툴리안의 삼위일체론은 유감스럽게도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의 초석이 되었는데, 이는 어거스틴(Augustinus)이 터툴리안의 삼위일체론을 이어받아 발전시키면서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의 기둥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도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고, 세 하나님께는 독자적인 개체성을 부여하기보다는 한 분 하나님의 내적 분리를 통해 상호간의 관계에 있어서만 아버지이고 아들이고 성령이시다고 가르쳤다.

터툴리안의 삼위일체론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칼 바르트(K. Barth)와 칼 라너(K. Rahner)라는 신구교의 신학의 대가들이 그대로 이어 받았다. 바르트는 터툴리안의 삼위일체 도식에서의 ‘페르조나’는 계몽시대 이후의 개체성이 들어 있는 의미의 인격이 아니었고, 단지 역할이라는 의미로 터툴리안 시대에 쓰이고 있었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런 까닭에 바르트는 삼위일체 도식을 “한 인격체(Person)와 세 존재양태(Seinsweise)”로 표현했다. 바르트가 표현한 세 존재양태는 터툴리안의 세 ‘페르조나’를 오늘의 독일어로 옮겨 놓은 것이었다. 바르트에 이어서 라너는 더욱 터툴리안의 표현에 가깝게 삼위일체 도식을 “한 인격체(Person)와 세 본체의 양태(Subsistenzweise)”로 표현했다. 이것은 터툴리안이 한 하나님을 하나의 본체로 표현한 것에 유래되고 있는데, 세 분 하나님을 한 하나님의 본체가 드러나는 세 가지 양태로 표현한 것이다. 바르트와 라너의 삼위일체 도식은 터툴리안의 삼위일체 도식의 20세기적 발전인데, 모두 양태론의 그림자를 벗기 어려운, 문제가 많은 삼위일체론 이었다.8)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은 고대 교회의 터툴리안에서 20세기의 칼 바르트와 칼 라너에 이르기까지 양태론적 성향의 삼위일체론의 하나의 흐름이 존재하는 반면 또 하나의 삼위일체론의 중요한 흐름이 있는데 그것은 3=1의 교리를 삼위일체론으로 보는 흐름이다. 이 흐름은 터툴리안에서 어거스틴으로 이어 내려오는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사고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와 동방교회의 캅파도키아 교부들에 의해 주장된 하나님은 세 분이시다는 사고를 종합한 것인데, 종교개혁자 칼빈(J. Calvin)에게서 뚜렷이 나타나고 오늘에 있어서는 스코틀랜드의 개혁파 신학자 토랜스(T. F. Torrans)와 독일 프라이브르그(Freiburg)의 카톨릭 신학자 그레스하케(G. Greshake)에게서 명백히 살펴 볼 수 있다.9) 그런데 이 3=1의 교리는 언뜻 보기에는 동서교회의 삼위일체론을 종합한 가장 훌륭한 삼위일체론으로 보이지만, 내용상으로는 종합될 수 없는 두 개의 사고를 합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결국 삼위일체론을 이해할 수 없는 교리로 만들어 버렸다. 하나가 셋이 되고 셋이 하나가 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진리도 아니다.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의 근본적 문제는 그것이 양태론적 성향의 삼위일체론이든, 3=1의 교리를 주장하는 삼위일체론이든 동서교회가 공히 고백하는 가장 귀중한 정통신조인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위배된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니케아-콘스타티노플 신조는 모든 형태의 일신론과 대립되어 있는 삼위일체적 신조인??,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은 두 개의 흐름 모두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고백하는 일신론의 터전 위에 있기 때문이다.

Ⅴ. 삼신론에 대한 잘못된 이해

한국교회 내에서는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말하면 정통이고 하나님은 세 분이라고 말하면 이단이라고 보는 생각이 팽배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고는 바른 사고도 아니고 정통신조에 입각한 사고도 아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서방교회의 전통 안에는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시되고 바른 고백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서방교회 신학의 삼위일체론의 전제가 전 세계교회의 정통신조인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와 충돌되고 있다는 점을 깊이 유념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또 하나 유의해야 하는 것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만들었던 캅파도키아의 교부들이 그들의 대적이었던 일신론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삼신론자라는 비판을 받았다는 점이다.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10)

삼위일체 신학의 토의들에서 삼신론의 비난은 사실적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 ‘세신들’에 관한 이론을 대변한 기독교 신학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비난은 먼저 고대의 아리우스파가 행했던 비난이었고, 그 다음에는 정통 기독교에 대한 이슬람의 비난이었다. 그 후에 이 비난은 동방교회 신학에 대한 서방교회의 비난이 되었고, 오늘날 그것은 자신의 현대적 양태론을 숨기는 데에 봉사하고 있다. 이슬람 유일신론의 전망에서 볼 때, 모든 기독교 신학자들은 - 어거스틴 혹은 토마스, 바르트 혹은 칼 라너, 판넨베르그 혹은 그레스하케 등 - ‘삼신론자’ 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하나님되심을 고수하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 부르기 때문이다.

몰트만이 말한 것처럼 이슬람의 유일신관에서 보면 모든 기독교 신학자들과 기독교회들은 삼신론자들인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학자들과 기독교회들은 성부 하나님 외에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신 하나님을 언급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태론적 이단의 눈으로 볼 때는 정통 삼위일체론은 언제나 삼신론이다. 그리고 삼신론은 언제나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주장하는 아리우스파를 비롯한 일신론 이단들이나 양태론적 이단들이 삼위일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공격하기 위해 사용했던 가공의 이론이었다는 몰트만의 주장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는 삼위일체론의 정통신조에서 이탈한 서방교회가 삼위일체론의 정통신조를 유지하고 있었던 동방교회를 비판한 이론이었다는 점도 유념해야 할 것이다. 바른 삼위일체론은 한 쪽에는 일신론과 다른 한 쪽에는 삼신론을 두고 그 가운데를 선택하는 3=1의 교리가 아니고, 성부, 성자, 성령이신 세 분 하나님께서 페리코레시스적 삶인 상호 내주와 함께하심을 통해 하나됨을 유지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독특한 삶과 존재방식을 설명하는 교리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하나님은 상호내주와 함께 거하심으로 하나이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께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라고 말씀하셨다.

결 언

“성령이신 하나님은 다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와 같은 표현을 우리는 한국교회 내에서 자주 듣게 된다. 그런데 이 표현은 일신론 이단으로 흐르는 표현이고, 양태론의 검은 그림자를 느낄 수 있는 표현이다. 바른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 안에 거하시고 성령 안에서 우리를 만나신다는 표현이다.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분이시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통해,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만난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고 “그리스도의 영”(롬 8:9) 이시다.

삼위일체론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혼동하기 위한 교리가 아니다. 성부가 성자가 되고 성령이 성부가 되는 괴상한 교리가 삼위일체론이 아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인격적 개체성을 위협하는 삼위일체론은 모두 잘못된 삼위일체론이고 이단적인 삼위일체론이다. 사과는 하나지만 껍질과 속과 씨가 있듯이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신다는 표현 역시 잘못된 삼위일체론의 비유이다. 위와 같은 비유는 일신론의 위장일 뿐이다. 위와 같은 비유가 삼위일체의 비유로 한국교회 안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은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철저한 일신론적 사고가 한국교회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부 하나님을 믿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이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이미 이슬람과 같은 일신론의 이교적 사상을 떠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삼위일체론은 일신론과의 투쟁과 대립을 통해 형성된 교리였다. 그것은 일신론과 삼신론의 중간에 있는 교리가 아니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똑같은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려는 교리였다. 그것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와 오순절 이후 성령의 경험을 통해 얻게 된 세 분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경험이 바탕이 된 교리였다. 그런 까닭에 삼위일체론은 성부 하나님의 경험밖에 없는 유대교의 일신론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기독교의 독특한 신관이었고, 이런 까닭에 초대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다.

김명용 /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조직신학)
월간 <교회와신앙> 2001년 10월호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