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배경
1. 지리적 배경(우주-지구-고대 근동 지방)
1) 팔레스타인은 아시아와 유럽과 아프리카의 세 대륙이 만나는 요충지이다. 따라서 이 장소는 각종 문화가 자주 충돌하는 곳이며, 세계에서 가장 이권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장소이다.
2) 팔레스타인은 흥망성쇠의 악순환이 자주 반복되었던 곳이다. 이 곳은 각 시대마다 세계를 지배하던 애굽과 앗수르, 바벨론, 파사, 그리고 헬라와 로마의 세력이 활동했던 곳이다. 따라서 그 사이에 끼여 있는 나라들은 이러한 강대국들이 전쟁을 할 때마다 전쟁에 휘말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강대국들은 팔레스타인 지방을 통과하여 전쟁을 하러 갈 때마다, 팔레스타인에 들러서 식량과 군수품들을 강제로 약탈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이스라엘은 독립하여 자주권을 행사한 기간이 불과 수백 년에 불과하였다.
3) 그 당시의 사람들은 전쟁이 각 나라의 신들의 싸움이라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정복하게 되면, 그 나라의 신이 승리한 것으로 간주하였고 승리국의 신상을 세우거나 그 종교를 믿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므로 여호와 유일신 신앙을 가진 이스라엘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 수많은 연단을 받아야 했다.
4)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러한 땅으로 인도하셔서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연단시켜 나가셨다. 구약 성경은 이스라엘 주변 국가들의 역사가 이스라엘의 신앙과 함수 관계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주변 국가들이 이스라엘의 신앙을 연단 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는 말이며, 따라서 이스라엘의 신앙 역사는 세계사이며, 세계사는 또한 인류 구원의 구속사라고 할 수 있다.
2. 이스라엘의 주변 국가들
1) 애굽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시대(족장 시대)부터 요셉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 들어간 시기에 애굽과 크게 연관을 맺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 애굽은 이 시기가 가장 역사의 황금기였다. 그러나 이 시기를 지나면서 애굽은 다시는 최강국으로 세계의 최강국으로 역사의 무대에 나타나지 못하였다.
2) 앗수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하게 되자 서서히 주변 국가들을 강대국으로 만드시고 그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연단 시키시고 징계하셨다. 앗수르는 다윗 왕 시대까지는(주전 1,000-961년) 이스라엘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으나, 그 후부터 서서히 강대국으로 부상하여 주전 841년에 이스라엘을 속국으로 만들었다.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 2세 때에 앗수르가 잠시 약해진 틈을 타서 이스라엘에게 독립의 기회를 주셨으나, 이스라엘이 계속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의 말을 거역하게 되자. 결국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하게 만드셨다(주전 721년).
3) 바벨론
앗수르는 매우 잔인한 민족이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또 다시 바벨론을 일으키셔서 앗수르를 치게 하셨다. 바벨론은 주전 621년에 압제자인 앗수르를 물리치고 세계의 강자로 등장하게 되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에도 계속하여 반역하는 유다를 이 바벨론을 통하여 멸망당하게 만드셨다. 바벨론 1차 침공 때에 다니엘과 함께 유다 민족이 포로로 잡혀갔으며(주전 606년), 2차 포로 때에는 에스겔과 함께 유다 민족들이 사로잡혀 갔다(주전 597년). 그리고 마지막으로 3차 침공 때에는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당하게 되었다(주전 586년).
4) 메대(메디아)와 파사(페르시아)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때가 이르게 되자, 다시 페르시아의 고레스를 통하여 바벨론을 점령하게 하셨다(주전 536년). 고레스는 유대 민족을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도록 귀환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유대 민족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과 성벽을 쌓게 된다. 이 기간 동안 유대는 파사의 속국으로 지내게 된다.
* 1차-스룹바벨과 여호수아-성전 재건
* 2차-에스라-영적 부흥
* 3차-느헤미야-성벽 완공
5) 헬라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은 주전 336년에 왕이 되었다. 그는 약 10여년 만에 세계를 정복하였다. 그러나 그가 바벨론 전투 중에 갑자기 죽게 되자 그의 부하였던 4명의 장군들이 그 영토를 나누어 가졌다(카산더-헬라 본토, 톨레미-애굽, 셀류코스-수리아, 리시마쿠스-그 외 지역들). 그런데 그 중에 애굽을 차지한 톨레미 왕가와 수리아를 차지한 셀류코스 왕가 사이에 팔레스타인을 차지하기 위한 다툼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게 되었다. 유대는 후에 수리아의 지배를 받게 된다.
6) 로마
그러나 그 후에 일어난 로마는 이 모든 나라들을 정복하고, 세계 최대의 국가로 역사에 등장하게 된다. 유대인들은 이런 환경 속에서 주전 165년경에 어느 정도 자치권을 인정받아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주전 63년에 폼페이가 수리아를 점령하게 되면서부터 팔레스타인은 또 다시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3. 구약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배경
1) 사울 왕 시대의 판도
2) 다윗 왕 시대의 판도
3) 솔로몬 왕 시대의 판도
4) 르호보암 시대의 판도
5) 파사 제국의 한 지방이었던 유다
6) 마카베오 시대의 판도
4.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배경-남신들과 여신들
1) 엘: 최고의 신이며, 모든 신들의 아버지
2) 바알: 엘의 아들로서 엘의 후계자/ 풍요의 신이며 하늘과 비와 땅과 폭풍을 주관한다고 믿음.
3) 못-악신, 전쟁의 신으로서 바알과 싸워 바알을 죽이나 바알의 누이인 아낫에 의해 죽임을 당함
4) 얌-바다의 신
5) 고대 근동의 3대 여신
* 아세라(목신)-엘의 아내이며 풍요와 번영의 여신으로 모든 신의 어머니
* 아스다롯-성을 주관하는 여신, 성적 매력과 미를 상징함.
* 아낫-전쟁의 여신, 바알의 누이이며 애인, 정열과 흥분을 상징. 못을 죽이고 바알을 다시 살림.
6) 몰렉(밀곰)-암몬인의 민족신, 자녀를 불에 태워 드리게 함.
이 신은 여러 나라에서 섬겼다. 그러나 그 이름은 각 나라마다 달랐다(바벨론: 탐누츠, 이스탈,
애굽: 이시스, 오리시스 등).
7) 농경 사회와 다신교
그들이 이러한 신들을 숭배한 이유는 이러한 신들이 농사를 지을 때에 풍요를 가져다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그들은 남신과 여신이 성적인 관계를 맺을 때에 자연에 생동력이 생긴다고 생각을 하였다. 그리하여 농부들은 성전에 창녀를 두고 창녀들과 성관계를 가짐으로써 바알과 아스다롯을 흥분시켜서 그들이 성관계를 갖게 만들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러한 음탕한 풍습을 가진 종교를 따르는 것을 강하게 금지시키셨다.
8) 다신교냐? 여호와 종교냐?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러한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우상을 섬길 것인지, 아니면 여호와 한 분만을 섬길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그들이 이러한 환경에서 유일신 사상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으며, 단호한 결정을 내려야만 하였다.
5. 내용 요약
1) 성경은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증명하는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성경이 기록되던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강림하심을 목격하였을 뿐 아니라, 그들은 날마다 하나님의 영광(불기둥, 구름 기둥)과 기적(만나, 메추라기, 반석에서 물이 나옴 등)들을 체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2) 성경은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 중에서 인간의 주 활동 영역인 지구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인간을 향한 자신의 계획과 뜻을 계시하신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행하신 모든 일들을 역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하신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을 구약에 언급된 "출애굽 사건"과, 신약에 언급된 '그리스도의 사역"이라고 말해준다.
3) 하나님은 과거에 인간의 모든 역사 가운데서 활동하셨으며, 또 지금도 활동하고 계신다. 성경은 이러한 하나님의 활동 중에서 특히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과 관계된 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인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 주변 국가들(애굽, 앗수르, 바벨론, 헬라, 로마)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상황과 영토는 어느 나라가 근동 지방의 패권을 쟁취하느냐에 따라 많은 변화를 받게 되었다.
4) 이스라엘의 주변에 있던 모든 국가들은 모두 자기 나름대로의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종교를 통해 얻기를 원했던 것은 신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이 땅에 풍성한 비를 내리고, 풍요와 축복을 얻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으로 이루어졌던 제사 의식들에는 음란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 많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러한 사람들이 사는 땅에 거주하게 하시면서, 이러한 종교를 배격하고, 오직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명령하셨다
신약 역사적 배경(마카비 이전시대)
1. 마카비 전 시대(페르시아, 헬라, 애굽, 시리아 지배 시대)
1) 메디아 페르시아의 유대 지배(주전 536년-331년)
# 페르시아는 앗수르나 바벨론과는 달리 피정복 국민을 자치 형식을 통해 통치함
#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영에 따라 유대 백성들은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할 수 있게 됨(에스라, 느헤미야, 학개, 스가랴, 말라기 시대).
# 사마리아인들과의 갈등
# 말라기
<페르시아 시대의 성경 역사>
2) 헬라의 유대 통치(알렉산더-주전 336-323년)
# 알렉산더의 페르시아 정복(333년)-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의 다리오 3세를 물리치고 광대한 영토를 가진 헬라 제국을 건설함- 왕이 된 지 14년만에 바벨론에서 죽음(323년)
# 알렉산더 사후-그의 부하인 4장군이 헬라 제국의 영토를 나누어서 차지함: 카산더(마게도냐, 헬라), 리시마쿠스(동북부의 트리키아), 톨레미(이집트), 셀류코스(시리아)
# 알렉산더의 헬라화 정책-유대인들은 페르시아의 통치기간 동안 나라를 잃기는 했으나 문화적인 동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페르시아인 보다 나은 문화를 가지고 있 다고 자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헬라 시대에는 그 사정이 달라졌다. 알렉산더 대왕은 가는 곳마다 지혜를 강조하였고 헬라주의를 심으려고 하였다. 헬라는 교육을 통해서 인도 주의 문화를 건설하였고, 유대인들에게 헬라 화를 강요했고, 제우스를 하나님의 위치로 올려 놓았다. 이로 인해 수많은 유대인들은 헬라화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3) 톨레미(애굽)의 유대 통치(주전 323-198년)
- 애굽을 통치했던 톨레미 왕가가 유대를 주전 323년부터 198년까지 통치함.
4) 셀류코스(시리아)의 유대 통치(주전 198-165년)
- 주전 198년에 유대가 톨레미 왕가에서 시리아의 왕 셀류코스 왕가의 손으로 넘어가게 됨.
* 안디오쿠스 4세의 유대인 박해 정책(주전 175-163년)
a. 성직 매매: 종신직인 대제사장직을 매매함
원래 율법을 준수하는 경건한 오니아스가 대제사장이었으나, 헬라화를 지지하는 그 동생 야손이 안티오쿠스에게 돈을 주고 대제사장직을 샀다. 그리고 3년 뒤에는 더 많은 돈을 낸 메넬라우스에게 대제사장직이 넘어갔다. 이로 인해 성전은 시리아에 의해 마음대로 약탈당하게 되었다.
b. 유대인 박해 정책
* 유대인의 율법 준수를 금하고, 제단에 희생을 드리는 것과 절기 준수하는 것을 금지함. 거역하는 자는 반역죄로 간주.
* 성전 제단에 제우스 신전을 세우고, 제단에 돼지를 제물로 드리게 함
* 애굽과의 1, 2차 전쟁(주전 169, 168년)에서 패한 후에 예루살렘 성전의 보물을 약탈함. 그러나 로마 장군인 포필리우스가 철수를 지시하였다. 그는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유대에 헬라화를 강요하였으며, 자신을 "에피파네스"(현저한 자)라 불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를 조롱하여 "에피마네스"(미친 자)라고 불렀다
신약 배경(마카비시대)
2. 마카비 시대(주전 166-139년)
1) 제사장 맛다디아의 봉기
경건한 유대인들('하시딤')은 안티오쿠스 4세의 정책에 반대하여, 목숨을 걸고 율법을 준수하려고 했다. 어느 날 하스모니아라고 하는 집의 가장이었던 마타디아가 제우스에게 제사를 드리던 자를 죽이고, 안식일을 준수하고 율법을 지키기 위해 광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경건한 자들이 이 세력에 연합하여 우상을 제거하고 배교한 유대인들을 척결함. 그러나 마타디아가 시리아와의 전쟁에서 전사함.
2) 유다 마카베오(166-160년)
마타디아의 아들인 유다 마카베오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군대를 인도함. 그는 시리아 요새를 점령하였고, 예루살렘과 성전을 탈환하였다. 그리하여 주전 164년 12월 25일에 제단에 제사를 다시 드릴 수 있게 됨. 시리아는 이들을 공격하였으나, 왕의 후견인인 루시아가 철수 명령을 내림으로 공격이 중단됨. 이로 인해 유다는 다시 율법을 준수할 수 있게 됨. 마카베오는 돈을 주고 대제사장직을 산 메넬라우스를 제거하였다. 그러자 시리아 왕 데메트리우스 1세가 또 다시 헬라화를 지지하는 알키무스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헬라화를 지지하기는 했지만 아론의 자손이었기 때문에 경건한 사람들('하시딤')은 자기들의 뜻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헬라에 항거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다 마카베오는 정치적인 독립을 얻어야 진정한 종교적인 독립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계속 시리아에 항거하였다. 그는 주전 160년에 시리아와의 전쟁에서 전사하였으며, 헬라화를 지지하던 대제사장 알키무스도 주전 160년 말에 죽고 대제사장직은 공석으로 남게 되었다.
3) 요나단 마카베오(주전 160-142년)
마카베오가 죽은 후에 그의 아들인 요나단 마카베오가 그 뒤를 이었다(주전 160-142년). 요나단은 데메트리우스 1세와 정적이었던 알렉산더 발라스를 지지하였는데, 결국 왕권 다툼은 알렉산더 발라스의 승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알렉산더 발라스는 자신을 지지해 준 요나단 마카베오를 유다 총독으로 임명하였고, 공석이었던 대제사장직까지 겸임하게 해 주었다(주전 153년). 그러나 경건한 사람들('하시딤')은 많은 피를 흘린 요나단이 대제사장이 된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으며, 마카베오 가문과 멀어지게 되었다.
4) 시몬 마카베오(주전 142-134년)
그러나 자칭 안디오쿠스 4세의 아들이라고 하는 자가 일어나서 알렉산더 발라스를 몰아내고 다시 왕권을 탈취하였으며, 그는 자신을 데메트리우스 2세라고 불렀다. 후에 데메트리우스 2세는 안티오쿠스 6세와 다시 세력 다툼을 하게되었다. 이때에 안티오쿠스 6세를 지지하던 트리포라는 자가 데메트리우스 2세를 지지하던 요나단 마카베오를 죽여버렸다(주전 142년). 요나단의 뒤를 이은 사람은 그 동생인 시몬 마카베오였다(142-134년). 시몬은 유다 군대의 총 사령관과 대제사장직을 겸하였다. 그는 마침내 시리아 군을 예루살렘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했다(주전 142년). 그리고 시리아에 더 이상 세금을 내지 않았으며, 나라에 새로운 평화의 시대를 열었다. 유대 백성들은 유대의 통치권을 시몬의 가문에 세습시킬 것을 결의했다(주전 140년). 그 이후 그의 후손들은 왕위를 세습하게 되었으며, 하스모니안 왕가라 불리우게 되었다. 이는 시리아에 가장 먼저 항거했던 마타디아의 아버지인 하스몬의 이름을 따른 것이었다.
신약배경(하스모니안왕국)
3. 하스모니안 왕국
1) 요한 힐카누스 1세(134-104)
# 시몬이 사위(톨레미)에 의해 살해된 후, 그 뒤를 아들인 요한 힐카누스 1세가 계승함.
# 지배권 확장:
그리심 산의 성전을 파괴하고 사마리아인들의 성지를 빼앗았다.
# 바리새인과의 갈등 지속
아론의 자손이 아니면서 대제사장 직을 맡음-바리새인들과의 갈등이 지속됨. 바리새인들은 정치, 군사적인 일에 손을 끊고, 율법 연구와 그 율법을 삶에 적용시키는 일에 전념함.
# 사두개파 시조:
바리새인들이 돌아선 것을 본 요한은 그들의 지지를 요구하지 않고, 냉정하게 현실주의적인 정치를 추구하였으며, 헬라주의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마음을 열게 되었다. 이러한 제사장과 귀족들을 중심으로 하는 사람들이 후에 사두개파를 형성하게 된다.
2) 아리스토 불루스 1세(주전 104-103년)
# 요한 힐카누스는 자기가 죽은 후에 그의 부인이 통치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인 아리스토 불루스가 자기 어머니를 몰아내고 세 명의 동생들을 감금시켰다. 그리고 자기 형제인 안티고누스를 죽이고 왕이 되었다. 그는 최초로 왕의 칭호를 사용했다.
3) 알렉산더 얀네우스(주전 103-76년)
# 아리스토 블루스가 죽게되자, 그의 아내인 알렉산드라 살로메는 감옥에 갇혔던 형제들을 풀어주고, 첫째 형제인 알렉산더 얀네우스를 왕으로 삼고 그의 아내가 되었다.
4) 알렉산드라 살로메(주전 76-67년)
얀네우스는 죽으면서 바리새인들과 화해할 것을 당부하였다. 유대는 그의 아내인 살로메에 의해서 9년간 다스려졌다. 그녀는 남편의 유언을 따라 바리새인들은 다시 산헤드린의 회원으로 세웠다. 이로 인해 바리새인들은 산헤드린을 통해서 자신들의 뜻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이 정책을 반대하였고, 살로메의 둘째 아들이었던 아리스토 불루스 2세가 이 반대 세력에 앞장섰다.
5) 아리스토 블루스 2세(주전 67-63년)
살로메가 죽게되자 장남인 힐카누스 2세를 왕으로 세우려 하였으나, 차자인 아리스토 불루스 2세가 그를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그러나 안티파텔이라는 사람이 힐카누스를 지지하여 그에게 왕위를 주기 위해서 다메섹의 아레타스 왕과 함께 예루살렘을 공격하였다.
신약 배경(로마통치시대)
4. 로마 지배하의 팔레스타인
1) 힐카누스 2세(주전 63-40년)-로마의 속국이 됨
이때에 로마의 폼페이는 마침내 시리아를 정복하는데 성공했으며, 따라서 로마는 세계 최대의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차남이 왕이 된 것에 불만을 품은 힐카누스 2세는 로마에 도움을 요청하였으며, 그 결과 주전 63년에 로마의 폼페이가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게 되었다. 폼페이는 로마를 반대하던 아리스토 불루스 2세를 제거하고 그의 형인 힐카누스 2세를 왕위에 올려놓았다. 그 결과 유다는 로마의 속국이 되어 로마에 조공을 드리는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후에 폼페이는 또 다시 줄리어스 시이저와 정권을 다투게 되었는데, 이때에 힐카누스 2세와 헤롯의 부친이었던 안티파텔이 시이저를 지지하였다. 결국 이 전쟁은 시이저의 승리로 끝이 났다. 시이저는 자기를 지지해 준 힐카누스 2세를 유다의 분봉왕으로 삼았으며, 안티파텔을 유다의 태수로 임명했다. 그리고 안티파텔은 자기의 두 아들 중 파사엘에게는 예루살렘을, 헤롯에게는 갈릴리를 통치하게 하였다. 시이저는 주전 44년에 암살을 당했다. 그리고 힐카누스 가의 잔을 맡은 자가 주전 43년에 동료인 안티파텔을 독살함으로 힐카누스 가문과 안티파텔 가문 사이가 크게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후에 힐카누스 2세가 자신의 손녀 마리암네를 헤롯과 결혼을 시킴으로 이 두 가문은 사돈간이 되었다.
2) 안티고누스 2세(주전 40-37년)
주전 40년에 카시우스가 시리아를 점령하였으나, 카시우스는 다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 누스에게 참패를 당하게 되었다. 그들은 후에 시이저를 지지하고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던 힐카누스 2세의 귀를 잘라 바벨론으로 추방해 버렸으며, 안티파텔의 아들인 파사엘은 자살을 하였다. 그리고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을 지지해 준 안티고누스 2세를 왕으로 세웠다.
3) 헤롯 대왕(주전 37-4년)
이때에 헤롯은 로마로 도망을 하였고, 후에 그는 로마의 도움을 받아 유다의 왕이 되었다. 이로써 약 100여년간의 하스모니안 통치가 종결되었다. 헤롯은 이두메아인(에돔인)으로서 머리가 비상한 책략가였고, 잔인한 독재자였다. 그는 주전 31년까지는 안토니우스를 지지하였으나 옥타비아누스가 정권 다툼에서 승리하게 되자 그에게 찾아가서 왕관을 벗어들고 자신을 처벌해 달라고 자청하였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헤롯을 용서하고 그에게 왕관을 씌워 주었다.
가. 통치 초기-권력 기반 마련을 위한 피의 숙청-
자신의 세력을 굳히기 위해 왕족인 아내와 장모, 동서, 그리고 힐카누스 2세까지 처형시킴.
나. 통치 중기-건축 사업-
수많은 건축 공사를 함. 그는 황제 신전, 극장, 경기장, 체육관, 목욕탕, 그리고 새 도시를 건축하였으며, 예루살렘을 그리스-로마식으로 바꾸었다. 그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성전을 건축하였으며(주전 20-주후 63년), 사마리아를 재건하여 황제를 기념하기 위해 그 이름을 따서 세바스테라 불렀고, 가이사랴에 항구 도시를 건설하였으며, 요새와 왕궁을 건축하였다. 그러나 그는 헬라주의자들만 요직에 앉힘으로 바리새인들의 반발을 샀다.
다. 통치 말기
자기의 아들을 모두 죽임(주전 7년). 주전 4년에 여리고에서 죽음을 당함. 마태는 바로 이 헤롯 때에 아기 예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다고 하였다(마 2:1).
라. 헤롯의 아들과 손자들
헤롯이 죽은 뒤에 그의 유언에 따라 유대 영토는 셋으로 분할되어 세 아들에게 나누어졌 다. 그리하여 아켈라오는 팔레스틴의 남쪽 지역, 빌립은 북동쪽, 안디바는 갈릴리와 베뢰아 지방을 다스리게 되었다.
가) 아켈라오(남쪽-폭정으로 폐위되고 총독이 통치하게 됨)
그는 분봉왕이란 칭호를 가지고 팔레스틴의 남쪽 지역을 9년동안 다스렸으며, 이 기간 동 안 그는 잔인하고 권력에 대한 지나친 욕망으로 폭정을 하였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유대와 사마리아 대표들은 아구스도 황제를 찾아가 그의 잔인성과 권력욕을 고소하여 그의 파면을 요구하였다. 그 결과 아구스도 황제는 그가 오랜 통치가 대규모의 반란을 야기시킬 것을 염려하여 6년에 그를 파면하고 추방하였다. 그 결과 6년에 그의 영토는 로마의 총독에게 돌려지게 되었다.
나) 빌립(북동쪽 지역)
그는 북동쪽 지역을 다스렸다. 그는 요단 동쪽 상류 지역에 파네이온을 재 설립, 확장하여 수도로 만들고 가이사 황제를 존경하는 뜻으로 "가이사랴"라고 불렀는데, 지중해 해안에 있는 또 하나의 "가이사랴"와 구분하기 위해서 이를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불렀다. 그는 중용을 취한 관대하고 정직한 통치자로 헤롯의 아들 가운데 가장 온순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의 생애 중에 이 영토에서 적들에게 해를 입지 않고 안전하게 활동하실 수 있었다.
다) 안디바(갈릴리와 베뢰아)
그는 갈릴리와 베뢰아 지방을 다스렸다. 신약 성경에 가장 잘 알려진 안디바는 헤롯의 아 들 가운데 가장 유능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충실한 아들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여우"라고 부르셨다(눅 13:32). 그는 그의 아버지 헤롯 1세처럼 헬라 문화의 장려자이며, 위대한 건설가였다. 가장 유명한 전설은 갈릴리 바다 서해안에 있는 디베랴 도성이었다. 이것은 그가 황제 디베료(22년)를 기념하여 명명한 것이었다. 그는 아라비아 아레타스 왕의 딸인 나바티안과 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후에 형제인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반하여 청혼을 하였고, 결국 그는 본부인을 내어쫓고 형제의 아내를 빼앗아 재혼을 하게 되었다.
세례 요한은 이러한 그를 책망하다가 투옥되었다. 헤로디아는 왕의 생일에 전 남편인 빌립에게서 난 딸 살로메를 춤을 추게 하였다. 안디바는 그녀의 춤을 보고 너무 기뻐서 그녀에게 무엇이든지 요구하라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뜻밖에도 그 어미의 지시대로 세례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이를 안디바가 승낙함으로 세례 요한은 죽임을 당했다(막 10:11).
자기 딸이 강제 이혼 당한 것에 분노를 느낀 아레스터 왕은 기회를 보다가 36년에 베뢰아 를 침공하여 안디바의 군대를 쳤다. 이에 39년에 안디바는 로마에 청원하여 더 높은 지위를 얻으려고 로마로 갔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아그립바 1세(헤롯 1세가 죽인 아리스토 불루스의 아들)가 먼저 안디바의 부정을 로마에 고발하였고, 이로 인해 로마 황제는 안디바를 분봉왕 자리에서 내쫓았으며, 그 대신 아그립바 1세를 그 자리에 앉혔다.
라) 아그립바 1세와 아그립바 2세
아그립바 1세는 야고보를 죽였으며(행 12:1-3), 베드로를 체포하였고 초대교회의 여러 지도 자들을 괴롭혔으며 44년에 죽었다. 그 뒤를 이어 17세밖에 안된 아그립바 2세(행 25장)가 즉위하였으며, 그의 연소함으로 인해 이때부터 이 지역은 로마의 영토나 다름없이 지배를 받았다. 66년에 이 지역에서 큰 반란이 일어났으나 70년까지 정권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70년 봄에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마침내 예루살렘 성은 무너지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성전을 중심으로 하던 유대교는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