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 ㅡ 프토코스
가난한 사람(πτωχός) 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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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어 형용사 프토코스(πτωχός)는 신약성경에 30번 이상 사용되었다. 형용사의 명사적 용법으로 이 단어는 ‘가난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예수님의 팔복 중에 첫 번째 복,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에서 ‘가난한 자’는 프토코스(πτωχός)의 복수형 프토코이(πτωχοὶ)이다. 이 구절을 누가복음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6:20) 라고 말하며, Q 자료 (마태와 누가가 참조한 예수 어록자료)에 나온 ‘마음이 가난한 사람’을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으로 편집했을 것이다.
‘가난한’이라는 뜻을 지닌 헬라어들이 여럿이 있지만, 헬라어 구약성경(LXX)에 나타난 대표적 단어는 프토코스(πτωχός)와 페네스(πένης)이다. 신약성경에서 전자는 30번 이상 사용되었고, 후자는 단 한 번 사용되었다(고후 9:9). 고전 헬라어에서 두 단어는 가난의 정도 차이를 미묘하게 말하고 있다.
프토코스(πτωχός)는 아무 것도 없이 가난하게 되어, 빌어먹는 거지(begger)가 되는 절대적 가난을 말하지만, 페네스(πένης)는 가난하게 되어서 힘들게 일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는 정도의 가난을 말한다. 프토코스의 동사 프토케우오(πτωχεύω)는 ‘가난하여 거지가 되다’(고후 8:9)의 뜻이고, 명사 프토케이아(πτωχεία)는 ‘가난’(계 2:9) 혹은 ‘구걸함’의 뜻을 가지고 있다.
셉투아진트(LXX)에서 프토코스(πτωχός)로서 100번 이상 번역된 히브리어는 ‘아니’(עָנִי)이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달’(דַּל)이나 혹은 ‘에비욘’(אֶבְיוֹן)과 함께 ‘가난한’이라는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시 82:3-4). 히브리어 아니(עָנִי)가 어원적으로 ‘아나’(ענה, 대답하다)에서 온 것으로 보면, ‘대답을 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의 의미로서 지위에 있어서 낮은 사람(inferior), 누군가에게 의존해야 할 사람(dependent)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아니(עָנִי)는 ‘부자’의 반대말이기보다는(시 49:1), ‘강한 자’ 혹은 ‘억압하는 자’의 반대말로 사용되고 있기에, 원래적 의미가 종교적 윤리적 의미를 내포하며 ‘온유한 자’ 혹은 ‘겸손한 자’의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히브리어 아니(עָנִי)는 헬라어 프라우스(πραΰς, 온유한), 혹은 타페이노스(ταπεινός, 겸손한)라는 단어로도 번역되었다. 모세오경에서 아니(עָנִ)는 불평등한 경제구조에서 자신의 기업(땅)을 가지지 못하게 된 가난한 나그네, 과부, 고아를 의미하고(출 22: 23-24), 이들에게는 율법이 긍휼을 강조한다(레 19:10). 그래서 구약성경은 “가난한 자들(עֲנִיִּים, 아니임)의 보호자”이신 하나님을 강조한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가난에 대한 사회적 정치적 고려가 별로 없었기에, 가난한 자의 보호자 제우스(Zeus)라는 개념이 없고 오히려 나그네가 신들의 사자일지도 모른다고 여기며, 나그네 대접이라는 도덕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며, 나그네/탄원자의 보호자 제우스 히케시오스(Zeus Hikesios)라고 하였다.
가난한 자의 보호자 하나님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말하기도 하지만, ‘가난한 자’의 의미가 ‘기업(땅)을 잘못된 사회구조에 의해서 박탈당하여 결국 절대적 가난으로 거지처럼 살아가게 되어 하나님께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를 말한다. 그들은 힘없고 겸손하게 되었지만, 종교적 윤리적 가치를 하나님 앞에 가지게 되었다. 신약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가난은, 히브리어 아니(עָנִי)의 포괄적 의미를 가지고 번역된 프토코스(πτωχός)이기에, 신약성경에서 절대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부 학자들은 ‘가난’의 문제를 복음서는 특별하게 주목하거나 이슈화 삼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가난한 자들의 불행과 곤궁에 역사적 예수는 긍휼과 애환을 분명히 가졌다. 예수 자신이 기업(땅)이 없는 가난한 예수였고, 함께 한 제자들도 결코 땅을 가진 지주나 부자의 그룹에 들어가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한 부자 청년을 향하여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πτωχοὶ)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막 10:21) 는 예수의 부르심은 예수의 그룹이 가난한 자들과 정체성을 함께 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가난한 과부의 미미한 헌금을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의 외식적 기도나 부자의 가식적 헌금보다 더 낫다(막 12:40-44) 고 말하는 것은, 가난에 대한 예수의 우호적 긍휼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부자청년의 이야기에서 마태복음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19:21) 고 편집하며, 온전한 의를 위해서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스스로 가난하게 되는 제자의 삶을 선포하고 있다.
이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마 5:20)이며, 율법을 온전하게 지키는 모습으로서 가난의 삶을 천국의 제자가 된 서기관인 마태복음 저자가 강조하고 있다(마 13:52). 예수님에게 다가와 향유옥합을 깨뜨린 여인에 대한 비난을 제자들, 혹은 가롯유다, 혹은 교회라고 본다면, 이것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막 14:7)- 가난의 사회적 이슈를 예수가 약화시켰다는 주장은, 결코 바른 해석이라 할 수 없다.
예수의 삶이나 교훈은 언제나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과 긍휼이 전제된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을 장사지낸 여인의 헌신을 부각시켰을 뿐이고, 가난한 자들과 항상 함께 하라는 말씀이 분명히 전제이다.
바울은 이방세계에 전도하면서 예루살렘의 가난한 자들(πτωχοὶ)을 기억해 달라는 사도들의 부탁을 언제나 지켰다(갈 2:10).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에게 가난한 자들을 위한 이방교회의 부조를 마지막까지 전하는 바울의 모습은 결코 가난의 문제를 신학적 영적으로만 희석화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바울은 사도라는 사명이 가난을 의미하고(고후 6:10),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이 가난하게 됨(고후 8:9)을 의미한다고 선포한다. 가난의 영성이 단순히 겸손과 온유함이라는 종교적 도덕적 의미만을 말하지 않는다. 제자가 되는 것,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가진 것을 포기해 가는 스스로 가난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라는 삶이었고, 사도라는 삶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