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로스, 아가페, 필레오)

 

에로스(εροs)

헬라인들은 육감(관능)적으로 즐거워하는 하급 신(神)인 에로스를 광란적으로 찬양하였다. 헬라인이 에로스에서 추구하는 것은 도취(intoxicaion)와 황홀이며, 이것은 그들에게는 하나의 신앙이었다. 그 반응은 무아경적인 흥분(광란), 때로는 증오와 더불어 나타나기도 하였다.

오로지 반응에 목적을 두고 완전히 감각 또는 감정적으로 몹시 흥분하는 에로스는 모든 인간성의 표준과 형태를 파괴한다. 관능적 환락(sensual ecstasy)은 중용(moderation)과 균형(proportion, 조화, 바른 관계 등)을 저 멀리 내버려 두고 돌보지 않는다.

헬라의 비극 작가들은 환락에 점점 빠지게 하여 이성과 의지와 판단력을 상실하게 하는 에로스(사랑의 신의 이름은 역시 에로스이다)의 불가항력적인 힘을 알고서, 그것을 광신만큼 무서운 것으로 평가했다.

따라서 에로스는 구약성경에서 잠 7:18("오라 우리가 아침까지 흡족하게 서로 사랑하며 사랑함으로 희락하자")과 잠 30:16("음부와 아이 배지 못하는 태), 이 두 곳에만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는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다.

아가파오(αγαπαω)

아가파오(아가페의 동사형)의 일반적인 의미는 존중과 호의 그리고 우정이나 동정이다. 에로스는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찾는 일반적인 세상적인 사랑인 반면에 아가파오는 분명히 그 대상을 선택하여 지키는 구별을 두는 사랑이다.

구약에서의 용법은 다음과 같다.

1) 남녀의 사랑 :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하나님과 관계, 그리고 남녀의 성적 관계를 시사해 준다. 이 남녀의 사랑은 이성(sexes) 상호 간의 생명력 넘치는 충동을 의미한다.(렘 2:25, 호 3:1; 4:18, 겔 16:37) 또한 남녀의 연애나 열애(창 29:18이하; 창 34:3; 삿 16:4), 합법적인 부부의 행복한 사랑(창 24:67; 삼상 1:5)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창조의 기사는 성의 구별과 부부간의 사랑이 생을 풍요하게 하는 은사임을 설득력 있게 이해시켜 준다(창 2:18이하).

그러나 이 사랑은 성적 사랑의 범위를 포함하지만 그것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오히려 헌신적 사랑과 생활의 충실함이 합쳐져 있다는 점에서 에로스와 다르다.

2) 자식, 가족 간의 사랑 :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사랑했으며(창 22:2), 리브가는 아들 야곱을 사랑했다(창 25:28). 야곱은 요셉과 베냐민을 사랑했다(창 37:3; 44:20). 잠언은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경계하느니라"고했다(잠 13:24).

또한 이 단어는 며느리의 시어머니를 향한 사랑과 같은 가족 간의 사랑을 표현한다(룻 4:15).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은 어느 곳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부모를 존중하고 존경하며 또 부모에게 복종해야 한다.

성경은 가족적 사랑이 너무 선택적일 때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삭은 에서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다(창 25:28). 그 결과로 야곱과 에서가 서로 반목하고 미워하게 되었다. 요셉에 대한 야곱의 편애로 인하여 다른 아들들이 요셉을 미워하고 시기하게 되었다(창 37:4). 배타적인 사랑은 증오가 들어올 수 있는 지점이 될 수 있다. 이는 사랑이 헌신적일 뿐만 아니라 책임을 다해야 하기 때문이다.

3) 친구의 특별한 애착 : 다윗과 요나단 사이의 사랑은(삼상 18:1, 3; 20:17) 여인의 사랑보다 더 깊은 우정의 차원이었다.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삼하 1:26).

4) 사회적 공동생활의 근본과 규범 :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레 19:18). 이러한 면에서 사랑은 이웃을 위한, 그리고 이웃을 향한 헌신이며, 이웃을 형제로서 받아들이는 것이고 이웃이 당연히 받아야 할 대우를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특히 외국인(레 19:34)과 가난한 자(레 25:35)와 고아의 권리와 관련된 사회적 법률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이웃 사랑은 단순한 친절이나 호의로 해석할 수 없다. 즉 편협한 배타주의를 배제한다. 바로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이웃이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적(enemy)으로 생각되는 것 같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도 의미한다.

그 이유로 신 22:1-4절이 동포를 도울 의무를 부과하는 것인 반면, 출 23:4-5절은 특별히 이 의무를 적대적인 사람에게 적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웃은 동료일 수도 있고 적일 수도 있으므로, 그는 사랑의 대상이지 법적 제한의 대상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의 개인은 법적 개인보다 우선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형태에서 출 23:4이하의 요구와 아마도 한층 더 높은 수준인 잠 25:21에 있는 기본적 진술("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은 원수를 향한 성향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지 않으나 한 특별한 방식의 행위의 의무를 지우는 것으로서, 원수에 대한 사랑을 실천적으로 가르치려고 한 것이다. 요셉은 그의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선으로 악을 갚는 그런 실례를 보여준다(창 50:19).

물론 구약성경에는 이러한 원수를 사랑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 시 109편과 잠 14:20 및 적대 국가들에게 향한 일반적인 태도는 이에 대한 예증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의해 부과된 윤리적인 요구의 고결함은 여전히 존재한다.

필레오(φιλεω)

신약에 나타난 필레오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나라가 개입되어 회복된 가족 또는 친족 간의 사랑이다.(마 10: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2) 예수님과의 사랑의 결속을 의미한다.

나사로의 경우 특별히 선택된 사람이며, 이처럼 선택된 자는 예수님의 친구라 불리는 것이다.(요 11: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3) 자기의 소유의 것을 사랑한다는 의미다.

요한은 이 세상과 이 세상의 것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아버지의 사랑이 없다고 했다.(요일 2:15)

요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4) 구원의 조건이다.

하나님을 사랑(필레오)하는, 즉 믿는 자들 사이에는 서로 사랑(아가페) 함이 있는 것이다. 그 사랑(아가페)은 하나님의 사랑(필레오)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믿는 자들 사이에게 당연히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디 3:15)

고전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딛 3:15, 나와 함께 있는 자가 다 네게 문안하니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너도 문안하라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5) 그리스도의 징계하시는 사랑(고전 11:32)은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다.

계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