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디아스포라'(그리스어: διασπορά)는 '흩뿌리거나 퍼트리는 것' 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특정 인종ethnic 집단이 자의적이든지 타의적이든지 기존에 살던 땅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유목과는 다르며, 난민 집단 형성과는 관련되어있습니다.

'디아스포라'는 
본토를 떠나 항구적으로 나라 밖에 자리잡은 집단에만 사용합니다. 
(난민 외에도 노동자, 상인, 제국의 관료로서 이주한 사례도 디아스포라에 해당합니다)
'디아스포라 문화'는 원주지역 사람들의 문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디아스포라 집단'에서 문화적 결속은 흔히 이들 집단이 언어 변화에 대해 집단적으로 저항한다거나 
고유의 종교 의식을 계속 유지하는 등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 기원과 발전
디아스포라가 처음으로 언급되는 부분은 신명기 28:25의 추방에 대한 내용인 "그대가 이 땅의 모든 왕국에 흩어지고"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이 그리스어로 번역되면서, 기원전 607년 바빌로니아인들과,
기원후 70년 로마 제국이 유대 지방에서 유대인들을 쫓아내는 부분에서 '디아스포라'라는 낱말이 쓰여 이 말이 지금의 의미를 얻게 되었습니다.
'디아스포라'는 이스라엘의 유대인 민족 집단이 해외로 흩어진 역사적 현상과 그들 집단 그 자체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아시리아인들이 피정복민에 대해 장래 이들이 자기네 몫의 땅을 요구하지 못하도록 사민정책(徙民政策)을 펴면서 이 낱말은 용례가 확대되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해외 식민시로 이주한 중심 도시국가의 시민들을 일컫는 말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최초의 근대 '디아스포라'는 1876년의 '그리스 디아스포라'입니다. 
서로 다른 기원을 가지고 있거나 다른 민족이 섞인 피난민들도 '디아스포라'로 불리기도 하지만 
'피난민'과 '디아스포라'는 동의어가 아닙니다.
영어에서 '디아스포라'란 낱말은 1950년대 중반부터 널리 쓰이게 되어, 
상당수의 인구 집단이 다른 특정 국가나 지역으로 쫓겨나 오래 살게 되는 데에도 '디아스포라'라는 말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디아스포라' 가 가지는 의미의 범위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윌리엄 사프란William Safran은 '디아스포라'와 이주 공동체를 구별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디아스포라'를 구성원들이 특정한 조건을 공유하는, 고향을 떠난 소수 공동체로 정의했습니다. 
사프란이 주장한,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특정한 조건' 은 
첫째로 구성원들이나 구성원들의 조상이 원래 살던 본원지에서 두개 이상의 주변지역이나 외국으로 흩어지고, 
둘째로 본원지에 대한 집합적인 기억과 신화를 보유하며, 
셋째로 그들이 현재 살고 있는 곳에서 완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아 사회에서 소외되어 있다고 느끼고, 
넷째로 그들의 본원지를 조건이 만족되면 되돌아 가야할 진정한 고향으로 여기며, 
다섯째로 집단적으로 본원지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본원지를 유지하거나 복구하는데 힘써야 한다고 믿으며, 
여섯째로 그들의 본원지와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민족적 공동체 의식과 단결을 명확히 하는 것이었다.


■ 디아스포라의 사례
□ 유대인 디아스포라
 오늘날 이스라엘 지역 바깥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이나 유대인 공동체를 총칭합니다.
이 말은 유대인들이 세계 도처에 흩어진 물리적인 현상을 가리키지만,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땅과 자신들과의 특수한 관계를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종교적·철학적·정치적·종말론적 의미를 함축하기도 합니다. 
이 관계에 대한 해석은 마지막에 '유배당한 자들을 한데 불러모은다'는 전통적 유대교의 메시아 희망에서부터, 
하느님이 세계 전역에 순수한 유일신앙을 촉진하기 위해 유대인들을 흩어놓았다는 개혁 유대교의 견해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최초의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BC 586년의 바빌로니아 포로 때문에 생겼습니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유대 왕국을 정복한 뒤 유대인 가운데 일부를 노예로 삼아 끌고 갔습니다.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페르시아의 키루스(고레스) 대왕이 BC 538년 유대인들에게 고국으로 돌아가도록 허용했을 때 유대인 공동체 가운데 일부는 자발적으로 유배지에 머물러 살았습니다.
초기 유대인 역사에서 가장 크고 중요하며 문화적으로도 가장 창조적이었던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성했는데, 
BC 1세기 그곳의 인구 가운데 40%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AD 1세기경에 팔레스타인 바깥에 살던 유대인들의 수는 대략 500만 명으로 추산되며, 
그 가운데 4/5는 로마 제국 안에서 살았지만, 팔레스타인을 자신들의 종교생활과 문화생활의 중심지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은 AD 70년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에도 이미 팔레스타인에 사는 유대인들의 수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그뒤 유대교의 주요중심지는 바뀌었으며(예를 들면 바빌로니아·페르시아·스페인·프랑스·독일·폴란드·러시아·미국), 
유대인 공동체들은 점차 뚜렷이 구별되는 언어·의식·문화 들을 받아들였는데, 그중 어떤 공동체들은 다른 공동체들에 비해서 비유대교적 환경 속으로 보다 철저히 빠져들어갔습니다. 
어떤 공동체들은 평화롭게 살았지만, 다른 공동체들은 격렬한 '반유대주의anti- Semitism'의 희생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의 역할과 민족적 동질성을 유지할 필요성 및 그 중요성에 대해서 매우 다양한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정통파 유대인들은 시온주의 운동(유대인들의 이스라엘 귀환 운동)을 지지하는 반면, 
일부 정통파 유대인들은 현대의 이스라엘은 하느님이 미리 정하신 때에 자기의 메시아를 보내려는 뜻을 방해하는 불경건하고 세속적인 국가로 여기고 그것에 반대합니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지하는 '셀릴라트 하갈루트'(shelilat ha-galut:유배를 부정함) 이론에 따르면, 
'디아스포라' 안에서의 유대인의 삶과 문화는 동화(同化)와 문화적 특성의 상실로 말미암아 멸망의 위기에 처해 있으며, 
이스라엘로 이민하는 유대인들만 유대인으로서 존속할 희망을 갖는다고 합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러한 입장을 비롯해 이스라엘에 호의적인 다른 어떤 입장도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성립이 메시아 시대의 도래에 관한 성서 예언의 성취라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개혁파 유대인들은 미국을 포함해서 다른 여러 곳에 사는 '디아스포라'가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고 있다고 여전히 주장하지만, 
1937년 미국 랍비 중앙협의회는 유대인들이 더이상 이스라엘로 귀환할 소망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선언한 1885년의 피츠버그 강령을 공식적으로 폐지했습니다. 
이 새로운 정책은 유대인들에게 조국 수립을 지원하도록 적극 장려했습니다. 
그러나 1943년에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유명무실해진 '미국 유대교 협의회'는 유대인은 종교적인 의미에서만 유대인이며, 
팔레스타인에 있는 유대인의 고국에 주는 일체의 지원은 그들이 살고 있는 나라에 대한 불충스런 행위라고 선언했습니다.
유대인 국가 설립을 위한 지원은 종종 박애적인 이유만 가지고 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대인들이 대량으로 학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난 뒤로는 본격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오늘날 전세계에 사는 약 1,450만 명의 유대인들 가운데 310만 명 가량이 이스라엘에, 590만 명 이상이 미국에, 그리고 210만 명 이상이 소련에 살고 있습니다.

집시 디아스포라
인도 북부지역에서 기원한 민족인 집시Gypsy는 꾸준한 이주를 통해 11세기에 페르시아에, 
14세기 초에는 유럽에 노예로서 공급되었습니다. 이들은 로마니어를 사용하며 고유 언어와 문화를 보존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대개 떠돌아 다니는 생활을 하면서도 공동체를 유지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박해를 받는 경우가 많았으며, 여러 국가로부터 추방당하기도 했습니다.

 아일랜드 디아스포라
19세기에 아일랜드인은 영국,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메리카 등지로 많은 사람이 이주했습니다. 
이주의 규모는 당시 아일랜드 인구의 45% 에서 85% 사이로 추산됩니다.
이주의 주요 원인은 아일랜드 대기근 때문입니다. 
아일랜드 대기근 외에도 종교적 차별, 산업 약화, 강제퇴거 등을 디아스포라의 원인으로 지목하기도 합니다.

 아프리카 디아스포라
노예 무역은 자주 노예들을 먼 곳까지 이동시켰습니다. 
그 중에서도 16세기부터 본격화된 대서양 노예 무역은 중서부 아프리카 흑인 원주민을 대규모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시켰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인구가 유럽인들의 전염병으로 심각하게 줄고, 유럽 세계에서 설탕과 담배등 상품작물의 수요가 늘자 흑인들의 강제 이주가 더 늘어났습니다. 
18세기까지도 꾸준히 증가한 노예 무역으로 수많은 흑인들이 고향에서 벗어난 채 비참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한편 미국의 일부 지역에서 노예제가 폐지되면서 노예제에 대한 의견 대립과 흑인과 백인 사이의 사회적 갈등이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이에 19세기 초에 미국 식민 협회의 후원으로 자유민 흑인과 해방 노예가 라이베리아로 이주하기 시작했습니다. 
20세기 초에는 마커스 가비 등이 중심이 되어 아프리카 복귀 운동이 펼쳐졌습니다.


■ 디아스포라의 영향
한 국가가 경제적으로 낙후되었거나 경제적 위기를 맞이하였을 때, 
자국 출신의 디아스포라에 경제적 지원을 받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과 인도는 경제적 위기를 맞았을 때 디아스포라 채권을 발행하여 도움을 받았습니다.
2011년에는 재정 위기를 맞은 그리스 정부도 디아스포라 채권을 발행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