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서를 기록한 예언자들 

 


이제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예언서를 기록한 예언자들에 대해서 살펴볼 때가 되었다. 그들의 선포와 예언서들은 그 당시에 한 부류를 형성하였으며, 그들은 위대한 영적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영광스러운 메시지를 선포하기 위해서 어떠한 고난도 감수하는 용기있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기록한 예언서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목록을 나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일정한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메시지를 선포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속해 있었던 시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시대에 예언을 한 사람들은 이들보다 훨씬 더 많았지만, 그들은 기록을 남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연구 대상이 될 수는 없다. 

 

 

1. B.C 9세기의 예언자들: 오바댜와 요엘

 

  8세기에 활동했던 아모스는 종종 처음으로 예언서를 기록한 예언자로 불리우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9세기 경에 이미 예언서를 기록한 예언자들이 활동했다고 믿을만한 증거가 있다. 오바댜는 처음으로 예언서를 기록한 예언자로 추정된다. 그는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 시대에 살았는데, 여호람은 이스라엘의 사악한 아달랴와 결혼을 했다(왕상 22:44, 대하 18:1, 21:6, 22:3,4,10). 여호람이 그의 보좌를 보존하기 위해서 그의 형제들을 죽인 것은 아마도 아달랴의 영향력 때문이었을 것이다(대하 21:4). 아달랴 자신은 나중에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그녀의 모든 손자들을 죽였다(대하 22:10). 오바댜의 사역은 이처럼 매우 혼란한 시기에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조국이 아닌 남쪽의 에돔에 대해 예언하게 하셨다. 그는 에돔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 대해 교만하게 행하였기 때문에 멸망할 것이라고 예고했다(옵 11-14).

 

또 다른 학자들은 BC 586년경 유다가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갈때 활동했던 선지자로 분류하고 있음.

 

  요엘은 7살에 왕위에 오른 요시아 시대에 활동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여호람의 통치가 끝나게 되자, 그의 아들 아하샤가 1년 동안 다스렸다. 그러나 그가 죽게 되자 아달랴가 손자들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어 6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그러나 신실한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인도 아래 아달랴는 죽임을 당하게 되고, 나이 어린 요아스가 왕이 되었다. 그리고 요아스가 스스로 통치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그를 인도했다. 요엘의 사역의 시기는 아마도 이와같이 여호야다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백성을 인도했던 때로 보인다.


2. B.C 8세기의 예언자들: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 요나

 

  8세기의 예언자들 중에서 4명은 그 활동 시기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아모스는 스스로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와 유다 왕 웃시야 시대에 예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암 1:1). 이러한 기록은 그가 주전 767년(웃시야가 전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해)과 주전 735년(여로보암이 죽은 해) 사이에 활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호세아는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그리고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때에 사역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사역은 주전 767년과 주전 753년 사이에 시작되었으며, 히스기야가 유다의 전권을 행사했던 것으로 여겨지는 주전 715년까지 계속되었다.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셨다. 여로보암 2세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나라를 성장시켰으며, 이로 인해 귀족들은 부를 축복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내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회개하지 않았다. 그들은 땅에 보물을 쌓고 자기의 쾌락과 번영에만 관심을 가졌다. 이로 인해 사회는 부정과 불의가 판을 쳤으며, 경제적으로 연약한 자들을 압제를 당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아모스와 호세아를 보내셨다.

 

  아모스와 호세아는 모세에 의해 확립되고 엘리야에 의해 제정된 선지자의 전통을 이어 받았다. 이 두 선지자에 의해 세상은 격렬하게 불타오르게 된다. 당시에 가난한 자와 경건한 자들은 사회 정의를 부르짖었지만, 부자와 권력자들은 사회 정치 구조에 만족하고 있었다. 신흥 대국 앗시리아는 아람을 점령했다. 여로보암 2세는 앗시리아의 정책에 순응해 가면서 영토를 넓혀 나갔다. 그러나 그는 장차 그 앗시리아가 이스라엘을 점령할 것을 알지 못했다. 그는 앗시리아와 아람, 그리고 이집트와 번갈아 가면서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아모스와 호세아는 이러한 여로보암 2세의 현실 정치를 비판했다. 그들은 이로 인해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패역한 백성이 되었는 지를 지적하였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율법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으며, 수없이 연단을 받은 후에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두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타락과 배교와 완악함을 꾸짖고, 그들의 멸망이 임박했음을 알렸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번영하는 현실로 인해 미래에 대해 낙관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한 세대가 지난 후에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의해 완전히 멸망을 당하고 말았다.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하기 직전에 하나님은 유다에도 이사야와 미가라는 두 선지자를 일으키셨다(주전 730년). 이사야는 유다의 웃시야, 요담, 아하스, 그리고 히스기야 왕 등이 다스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사야가 이스라엘 왕들의 명단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그가 아모스나 호세아와는 달리 유다만을 위해 예언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웃시샤 왕이 죽던 해인 주전 740년에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그는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죽음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사 37:38), 이 일은 주전 681년에 있었던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가역 기간은 약 60년 정도 계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다른 예언자들에 비해 매우 긴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미가 역시 유다를 위해서 예언했기 때문에, 그가 예언했던 시기의 유다 왕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는 유다 왕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왕 때에 활동을 했다. 그는 이사야가 사역을 시작한 얼마 후에 사역을 시작해서, 이사야가 사역을 마치기 전에 사역을 마쳤다. 요담의 통치는 주전 731년에 끝났고, 히스기야는 주전 715년에 전권을 행사했기 때문에, 그는 이 기간 중에 활동한 셈이 된다. 이사야와 미가 역시 북 이스라엘의 권력과 자만, 그리고 그들의 실용정책을 비판했다. 그러나 북 이스라엘이 주전 722년에 멸망을 하게 되자, 그들은 남 유다에도 경고를 하기 시작했다. 남 유다 백성들은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기 때문에 자신들은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사야와 미가는 북 이스라엘의 멸망이 그들의 멸망의 전조가 된다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요나는 자신이 예언했던 때를 기록하지 않고 있다. 아마도 그 이유는 그가 이스라엘이나 유다를 위해 예언하지 않고, 이방 나라인 앗수르의 니느웨 성을 향해 예언했기 때문일 것이다. 요나서가 기록된 연대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존재한다. 첫 번째 연도는 아모스가 사역을 하던 시기인 주전 760년이다. (왕하 14:25)은 요나가 여로보암 2세에게 예언을 했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때는 8세기 전반기였다. 이 구절은 또한 그가 니느웨 뿐 아니라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자였음을 보여준다. 그 이유는 이 구절이 여로보암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영토가 하맛 어귀에서부터 홍해 바다까지 회복될 것을 그가 예언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요나는 주로 8세기 전반에 사역했지만, 나머지 예언자들은 모두 주전 760년 이후에 사역했으며, 특별히 호세아와 이사야와 미가는 주전 740년 이후에 활동했다. 이들 4명의 예언자들 중에서 2명은 이스라엘을 향해 예언했고, 2명은 유다를 향해 예언했다. 이들은 또한 주전 8세기 중엽 및 후기에 활동했다.

  스라엘이 멸망한 후에 유다 역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사야와 미가는 사마리아의멸망과 히스기야의 통치 아래 예루살렘의 정치가 부침하는 기간(주전 729-686년)에 사역을 했다. 두 선지자 모두 유다와 그 지도자들에게 현실정책이 주는 만족을 거부하고, 여호와의 왕국을 바라보며 의와 정의와 성실을 행하도록 권고했다. 그러나 대중의 기대(백성의 목소리)는 낙관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생활태도를 장려하였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시고유다와 함께 행하신다는 약속을 환영하면서 이사야와 미가의 신탁을 선택하여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께 복종을 요구하는 선지자들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왕과 성전이 결코 침해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지켜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의 약속과 예루살렘의불가침성과 하나님께서다윗에게 주신 약속의 영원성, 즉 시온신학에 사로잡혀 있었다.


3. B.C 7세기의 예언자들: 나훔, 예레미야, 스바냐, 하박국

 

  유다의 실용주의적 생활 방식은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주전 696-642년)에 의해 크게 확장되었다. 그의 현실정책의 실행은 유다를 다른 나라들과 똑같이 만들었다. 그의 비루한 정부가 55년 동안 다스리고 지나간 후에 유다에는 시내산이나 시온 전통의 독특한 특징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처음에 스바냐와 예레미야는 느낫세의 손자 요시야에 의해 이루어진 개혁들을 기쁨으로 증언하였다. 그러나 요시야(주전 640-609년)의 개혁은(주전 622년) 외적이었고 단명하였다. 스바냐는 요시야의 다스리던 때에 사역을 했다(습 1:1). 요시야는 31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는데, 아마도 스바냐의 활동 시기는 적어도 주전 621년 이전이었을 것이다. 그는 여전히 이방의 제단들이 남아 있었다고 기록하였는데, 이는 주전 621년에 요시야 왕에 의해 모두 제거되었다. 아마도 스바냐는 나훔과 예레미야와 더불어 요시야로 하여금 개혁을 감행하도록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요시야 사후(주전 609년) 유다의 정세는 보다 분명히 현실정책을 추구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앗시리아의 멸망은 고대 근동의 형세를 바꾸었다. 나훔이 예언한대로 니느웨는 주전 612년에 파괴되고, 앗시리아 제국은 주전 605년에 멸망하였다. 나훔은 그의 사역 시기에 대해서 특별히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사역 시기는 대체로 (나훔 3:8)에서 나타난 것처럼 애굽의 테베가 멸망하던 해(주전 663년)와, 니느웨가 멸망한 때(주전 612년) 사이였다. 그의 예언서의 주제는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의 예언은 미느웨가 멸망하기 수년 전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가 사역을 시작한 것은 주전 630년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 70년간은 바벨론이 세력 구조를 지배하였다(렘 29:10). 바벨론의 성공은 처음에 앗시리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되었다(사 10:5-19). 그러나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바벨론 역시 유다를 심판하는 하나님의 도구인 것을 선포하였다.

 

  하박국은 그의 예언 시기를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가 (합 1:5-6)에서 바벨론의 침공을 예언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아직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그가 적어도 느브갓네살이 처음으로 예루살렘을 공격한 주전 605년 이전에 예언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마도 그가 사역한 시기는 요시야의 통치가 끝나던 주전 609년부터 여호야김이 다스리던 때까지 일 것이다. 우리는 이 시기에 있어서의 예언자들의 집단을 살펴보았는데, 이들 중에서 7세기 전반에 활동한 예언자는 한 명도 없으며, 모두 7세기 후반에 활동하였다. 하박국은 바벨론의 예루살렘 침공을 내다보며 기절할 듯이 놀랐다. 그는 어떻게 하나님이 유다를 징벌하기 위해 사악한 나라를 사용할 수 있는 지를 물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모든 것이 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며, 의인은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왕국의 영광스러운 건립을 인내하며 기다려야 함을 확신시켰다.

 

  예레미야 역시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였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중대한 위기에 봉착했던 때에 하나님의 대언자로 일했다. 예레미야는 그의 사역을 시작한 때가 요시야 왕 13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요시야는 주전 640년에 다스리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요시야 왕 13년은 주전 627년이 된다. 예레미야는 유다가 포로로 잡혀간 이후까지 사역했기 때문에, 그는 요시야,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그리고 시드기야 시대와, 에루살렘 성이 멸망한 후에 그 곳에 남아 있던 백성들이 그를 강제로 이끌고 애굽으로 내려간 시기까지 예언 활동을 했다(렘 43:1-7). 그는 애굽으로 내려간 백성들에 대해서도 예언했는데(렘 43:8-44:30), 그가 죽을 때까지의 기간에 한 사역에 대해서는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서 함락된 것은 주전 580년이기 때문에, 그가 주전 627년부터 580년까지 약 47년 동안 예언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그 도시와 성전과 다윗 계열의 왕이 바벨론에 굴복당할 것을 선언했다. 그는 70년 간의 바벨론의 통치가 끝난 후(렘 29:10), 하나님이 회복과 언약과 용서와 성전과 메시야가 의로 다스리는 새 시대를 열 것을 선포하였다(30:5-33:26).


4. 포로기 중의 예언자들: 다니엘과 에스겔

 

  포로기는 황폐한 시대였던 동시에 회복의 시대였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성전의 황폐,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 약속의 땅으로부터 백성들의 분리, 다윗 왕조의 제거를 의미하였다. 포로기는 또 이스라엘과 유다의 경건한 남은 자들에게 일체감을 가져다 주는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회복의 영에 의해 영적인 변형이 이루어지는 시대를 열었다.  그 변형은 여호와와 정경적인 계시와 그의 심판의 지혜에 새롭게 충성할 것을 다지고, 완전한 회복을 새로이 갈망하는 데서 입증되었다.

 

  이 과도기에 하나님은 그의 특별한 종을 세웠다. 다니엘은 예언자로 부름을 받지 않고 바벨론 궁전에서 행정가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예언적 환상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그는 예언자에 포함되는 것이 마땅하다. 다니엘이 활동한 기간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다. 그는 그의 세 친구인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와 함께 여호야김이 다스린 지 3년(단 1:1), 즉 주전 605년 여름(여호야김 통치는 주전 605년 10월에 끝났다)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 그는 고레스가 주전 539년에 바벨론을 함락한 후까지, 그리고 적어도 고레스 3년까지(단 10;1) 활동했다. 따라서 그는 바벨론에서 66년동안 활동했다. 그는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약 20년 전에 망명하며 바벨론이 몰락할 때까지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으로 바벨론의 고관으로 있었다. 그는 외국의 왕들에게 영감 어린 조언을 주고, 하나님의 왕국에 대해 증언했으며,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해 기도했고, 하나님의 왕국이 승리를 거부며 전진할 것에 대한 계시를 받았다.왕국 환상으로 그는 구속사에서 자신의 위치에 대해 보다 넓은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현실 정책이나 백성의 소리가 주는 덫에 빠지지 않았고, 바벨론의 도덕 체계에 만족하지도 않았다. 다니엘은 그의 동시대인들보다 단연 뛰어났으며,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사랑으로 그 명성을 떨쳤다. 이 충성스러운 종은 하나님의 왕국을 열망하였던 성실한 사람이었다.

 

  에스겔은 주전 597년에 포로로 잡혀갔는데(겔 33:21, 40:1, 왕하 24:11-16), 이 때는 여호야김이 바벨론으로 잡혀간 때였다. 그는 적어도 포로로 잡혀간 지 27년이 되는 주전 571년까지 활동을 계속했는데(겔 29:17), 이 기간 중에는 느부갓네살이 계속해서 다스리고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살았지만 다니엘만큼 오래 살지는 못했다. 다니엘이 왕궁에서 사역을 했다면, 에스겔은 포로로 잡혀간 유다 백성들 중에서 예언자로 활동했다. 에스겔은 바벨론에서 부름받은 하나님의 종이었다. 그는 작은 규모의 포로인 집단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한 것을 설명하였다. 그는 또 만물이 하나님에 의해 성별되고 성령에 의해 새 민족으로 변화되고, 그의 백성 가운데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은혜를 누리는 회복의 시대에 대해 예고했다. 이 선지자들은 심판과 회복에 있어 여호와의 위대한 행위를 말하면서, 여호와와 그의 약속들을 모세 해석에만 국한시켰던 전통적인 신학의 경계를 넓혀나갔다. 그들은 그 약속들의 전통적인 개념을 타파하고, 그것들을 더욱 웅장하고 경이로운 것으로 제시하였다. 그들은 여호와가 언약과 약속에 신실하시며, 성령이 새 시대, 즉 영적인 변형이 이루어지는 새 언약의 시대를 열 것을 선포하였다.


5. 포로 후의 예언자들: 학개, 스가랴, 말라기

 

  포로후기(주전 538년)의 복된 소식은 언약을 갱신하고 약속을 성취하는 여호와의 위대한 사랑에 있었다. 그는 그의 백성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그 땅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그들과 함께 거하고, 그들을 축복하고 보호하였던 것이다. 제사와 희생과 성전 예배와 제사장직과 명목상의 다윗 왕조(스룹바벨)가 포로 후기에 회복되었다. 학개와 스가랴가 사역하였던 포로 후기의 상황은 포로 전기 선지자들의 상황과 판이하게 달랐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은 후에 나온 그들은 하나님이 다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복된 소식으로 하나님과의 백성으로 격려하였다. 그들은 만약 하나님의 백성들이 오직 그의 왕국을 열심히 구하기만 한다면, 약속들이 성취되는 훨씬 더 위대한 시대가 올 것을 약속하며 그들을 독려하였다.

 

 5-1. 성취의 시대

 

  분명히 새 언약의 시대는 이미 포로후기에 시작되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과 함께 하였고, 성령이 권능으로 임재했으며, 성전이 복구되었다. 다윗의 자손은 스룹바벨은 메시아 왕국에 대한 하나님의 상징이었다. 비록 포로 후기 선지자들이 왕(스룹바벨)과 제사장(여호수아)의 신정 상 지위의 연속성을 확인하였으나, 그들은 역시 성령의 권능으로 주 하나님을 섬기도록 개개인을 초청하기도 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개혁과 더불어 포로 후기 선지자들은 신정의 쇄신을 위해 견고한 토대를 마련했다. 그 신정은 확연하게 성전, 하나님의 법, 성령의 역사, 그리고 세상적 관습들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정화하는 데 관련된 것들이었다. 포로 후기의 백성들은 성도는 아니었으나, 그들은 선지자들과 신정 지도자들이 주는 도전에 반응하였다. 선지자들의 저서와(학개, 스가랴, 말라기, 요엘) 역대기와 에스라-느헤미야서가 포로후기 하나님 백성의 급격한 변화를 잘 증언해 준다.

 

  스가랴는 모두 그들의 예언이 시작된 때가 다리오 왕 2년(기원전 520년-학, 1:1, 슥 1:1)이었다. 그러나 학개는 그 해에만 계시를 받고 예언한 반면, 스기랴는 그 후에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 그들의 예언의 주제는 예루살렘 성전 재건의 필요성이었다. 백성들은 제 1차 포로 귀환이 있었던 주전 538년,537년에 성전 건축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사마리아인들의 방해로 공사를 중단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성전은 기초만 놓여진 채로 16-17년 동안 방치되었으며, 이로 인해 그들은 주변의 백성들에게 조롱을 당했다. 그러나 마침내 학개와 스가는 주전 520년에 백성들에게 성전을 건축하라고 용기를 주라는 계시를 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사역은 곧 효과를 보기 시작했다. 백성들은 중단했던 성전 공사를 다시 재개했으며, 마침내 주전 515년에 성전을 재건하기에 이르렀다.

 

  말라기의 연대를 추정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그의 사역의 시기가 학개와 스가랴 이후인 것은 분명하다. 그가 사역하던 때에는 바사의 총독이 예루살렘을 다스리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말 1:8). 그는 성전에서 종교적 제의들이 행해지고 있었다고 말하는데(말 1:7-10, 3:8), 이는 당시에 성전이 이미 재건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는 또한 백성들이 범한 죄를 책망했는데, 그가 열거한 죄의 내용들은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열거한 내용과 비슷하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에스라와 느헤미야 당시에 활동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에스라와 느헤미야서에 언급되고 있지 않은 점을 보면, 그는 에스라와 느헤미야서가 기록된 직후에 활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해서 그의 활동 시기는 주전 5세기 말로 추정된다.

 

 5-2. 소망의 시대

 

  비록 포로후기 공동체가 일부 약속들의 실현을 체험했을지라도 실제 성취는 지연되었다. 백성들은 성취를 향한 진전이 더딘 것에 실망하였다. 포로 후기 선지자들은 여호와께서 웅대한 회복에 대한 그의 약속을 분명히 지키는 것을 믿도록 백성들을 격려하였다. 선지자들은 또 백성들 편에서 그 성취를 서두르도록 권면하기도 했다. 그들은 남은 자들을 자극하여 하나님과 반문화 건설에 보다 큰 사랑과 열심을 쏟도록 하였다. 그들은 또 경건한 자들이 실제적인 소망을 가질 것을 촉구하였다. 포로 후기 선지자들은 예언의 말과 성취 사이의 부조화를 처음으로 취급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회복에 대한 약속의 성취가 점진적이며, 하나님은 자유하시고, 인간의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도록 도왔다. 그들은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지키나, 그의 약속을 성취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자유로우신 것을 밝혔다. 포로 후기 선지자들은 내적으로 배교와 외적으로 이 세상 왕국들의 박해와 저항을 받으며, 구원이 임할 것을 지적함으로써, 구속의 진전을 보다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진실성을 확인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의 성도들에게 그의 왕국의 기쁨과 메시아 시대와 새 창조로 보답할 것을 소망하며, 끝까지 하나님께 충성하도록 경건한 자들을 격려하였다.

 

 5-3. 소리의 종교

 

  그 후에 나타난 계시 종교의 타락을 선지자들과 경건한 남은 자들에게 책임을 지울 수 없다. 포로후기 공동체 역시 포로 전기 공동체가 겪은 동일한 문제로 계속 고통을 당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과 인습으로 고착시켰다. 그들 역시 성취에 대한 그들의 기대가 잇따른 사건들로 좌절되자, 현실에 체념하기 시작했다. 계시에서 백성의 소리의 종교로 점차적인 전환은 우리 주님이 유대 지도자들에 의해 거부당한 이유를 설명해주며, 더 나아가 기독교 역사에 거듭거듭 되풀이하여 일어난 일들을 설명해 주기도 한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근시안적인 환상과 인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제한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영원한 것을 시간과 공간의 범주 안으로 몰아넣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성령과 보조는 맞추는 대신 현실정책과 백성의 소리의 길을 걸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리스도의 재림과 다가올 구원을 늘 생생하게 소망하지는 못했다.

 

  예언서를 기록한 예언자들을 살펴볼 때에, 성경에 나열된 소선지자들의 순서는 그들이 활동한 시기를 암시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가장 먼저 사역한 소선지자들은 모두 9세기나 8세기에 활동한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그리고 미가이다. 그 다음으로 사역한 소선지자들은 7세기에 활동한 나훔, 하박국, 그리고 스바냐가 있다. 예레미야는 재선지자이기 때문에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다. 포로기 이후의 예언자들은 학개와 스가랴와 말라기가 있다. 포로기에 활동했던 다니엘과 에스겔은 대선지자이기 때문에 여기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처럼 성경에서 소선지자들이 등장하는 순서는 그들이 활동했던 시기를 기억하는 데 도움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