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2:24)
한글 : 내가 진실로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영어 : Truly, truly, I say to you, Unless the grain of wheat falls into the ground and dies, it abides alone;
but if it dies, it bears much fruit.
헬라어 : αμην αμην λεγω υμιν εαν μη ο κοκκος του σιτου πεσων εις την γην αποθανη αυτος
μονος μενει εαν δε αποθανη πολυν καρπον φερει
우리는 곡식의 종자를 심으면 저절로 자라서 열매를 맺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열매'(fruit)로 번역된 헬라어 καρπος [karpos ; 카르포스]는 '붙잡다, 쟁취하다, 따오다. 폭력을 행사해서 빼았다' 등의 뜻이 있는 헬라어 ἁρπαζω [harpazo ; 하르파조]에서 유래된 단어입니다.
한글역 열매로 번역된 헬라어 καρπος카르포스는 통상 수확과 결실이란 뜻으로 사용됩니다. 열매란 한 나무의 뿌리에서 수액을 공급받아 그 생명공급의 결과로서 나타난 결과물로 이해됩니다.
결과물로서 이해되는 열매는 성서에서 주로 그리스도인이 행하는 착한 행실에 집중됩니다. 대표적인 예로 동서고금을 막론한 속담의 인용, ‘나무를 보면 열매를 알 수 있다.’고 말할 때 열매 비유가 종종 사용됩니다. 나무가 제대로 된 생명을 수혈 받지 못하거나 혹은 생명과는 무관한 다른 기운에 휩싸였을 때, 제대로 된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말할 때, 열매 비유가 사용되며, 이러한 비유는 소위 말하는 ‘그리스도인다움’에 대한 요청으로 이어집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말만 하지 말고 실천으로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을 보여야만 한다. 그러면서 내세우는 것이 열매입니다. 그런데 그 열매란 것이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품성 변화, 인격의 변화, 말의 변화 등에 집중되거나 조직으로서의 교회를 향한 무한 충성, 종교생활의 충실성 여부를 두고 판단합니다. 그렇지 않음 신비적 현상을 목격하는 것을 그 존재의 믿음이 제대로 되었다고 판단하는 열매 기준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성서에서 말하는 열매란 그런 결과물을 뜻하는 것일까요.
일단 두 가지 문제에서 열매에 대한 재고가 필요합니다.
첫 번째 문제는 열매를 결과와 수확물로 이해해야 하느냐에 대한 문제이며,
두 번째 문제는 열매가 만약 무엇인가 나타난 것의 결과물이라면 그 결과물은 대체 어떤 내용이냐는 것입니다.
첫 번째 질문. 열매를 결과와 수확물로 이해해야 하느냐에 대한 성서에서의 답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수확물이면서도 수확물이 아닌 것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성서에서 말하는 열매는 나타난 완성품으로서의 결과물만이 아닌 과정도 상태도 다 함께 녹아들어 있는 의미입니다.
열매는 그 자체로 씨를 갖고 있습니다. 그 씨는 본래 생명의 씨앗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가 땅을 상징하는 우리의 마음, καρδια카르디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생명 씨앗의 돌파로 인해 땅의 상징인 인간은 그 내적 형질이 변화되게 되었습니다. 그 형질의 변화 자체는 내적 세계의 수혈을 통해 외적 세계, 존재의 외부로 표출되는 하나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물은 생명의 씨를 품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열매는 곧 땅이며, 이 땅이 내적으로 변화되는 형질의 동시성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변화하는 그 형질 변화 자체에 열매와 씨가 동시적으로 현현되는 것이므로 이것은 곧 과정과 결과의 동시 개안을 뜻합니다. 이러한 동시 개안이 가능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하나님 시간의 드러남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시간은 무시간적 창조 시간에 기인하고 있기에 열매는 곧 생명의 변화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선적 시간의 목표 성취에만 매달리지 않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열매가 어떤 결과물이냐는 것입니다. 이 결과는 과정을 끌어안은 것인데, 그것은 바로 내적 세계의 말씀 신비가 외적 세계를 내적 세계와 하나로 이끌어내는 생명 통합의 과정, 그 변화 자체입니다. 이 변화의 격동성은 본래적으로 우리 안에 영의 몸을 이끌어내는 생명의 환희에 주목합니다. 그 생명 환희는 도덕을 우선합니다. 소위 말하는 그리스도인다움이란 상대적 선함의 기준, 인간의 사회나 구조, 이념에 따라 다른 잣대를 들이미는 양심의 기준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그 생명 환희는 온전히 내적이면서도 또 한편으로 온전히 외적입니다. 내적 세계의 열림은 외적 세계의 단절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열매란 바로 내적 세계의 신비가 외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단 하나의 생명 사건입니다. 내적 세계가 결과라면, 외적 세계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이미 주어진 결과가 과정 안에서 펼쳐집니다. 그러므로 열매는 곧 ‘나’이며, ‘땅’일진대,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생명 씨앗이 ‘우리’인 ‘나’안에서 풀어지고 새로운 싹을 내는 생명 태동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열매로서의 거듭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