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뿌리는 자의 비유
(마 13: 1-9 , 18-23)
1. 길가와 돌밭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 비유의 방법을 종종 사용하셨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어려운 진리를 일상 생활에서 흔히 경험하는 일들과 비교하여 쉽게 가르치시려고 하는데 있다.
그러나 이 비유는 믿음으로 듣고 깨닫는 자에게는 진리 이해에 있어서 그 명료성과 심오성을 더해주는 것이지만 불신하여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는 진리를 허락하지 않으시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마 13장에서 일곱 가지의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그 첫 번 째가 바로 본문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이다.
여기서 씨는 '하나님의 말씀', 복음, 진리 등을 상징하고 '씨를 뿌리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 또는 복음 전도자, 등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길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 등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마음의 상태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길가에 떨어진 씨는 새들이 먹어 버렸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새는 사단 을 가리키고 있다.
길은 많은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곳으로서 이는 세속적 교훈, 장로들의 유전, 철학 등으로 이미 다져져 복음을 받아들여 지킬만한 마음의 바탕이 되어 있지 않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들은 복음을 들어도 그들의 교만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해 버린다는 것인데 이는 사단이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시다.
천국은 세속적 지식이나 이성적 사유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믿음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돌밭은 토양이 깊지 않아서 씨가 발아를 했다가도 뿌리가 없어 볕이 뜨거우면 곧 말라 죽는 밭이다. 이는 복음을 듣고 기쁘게 받아들이나 그 복음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생겼을 때에 믿음의 뿌리가 없으므로 쉽게 믿음을 버리는 심령을 가리키는 것이다.
초신자들에게 우리는 이런 경우를 흔히 보게 된다.
교회는 이런 자들에게 '돌'로 표현된 장애 요소를 제거해 주어야 한다.
2. 가시 떨기
예수께서는 세 번째로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씨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이 가시떨기와 같은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 심령 속에서 잘 자라게 하나 가시 떨기도 함께 자라게 함으로서 말씀의 성장을 가로막아 질식하게 하는 경우를 가리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가시떨기를 세상의 염려와 재리에 대한 유혹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다.
세상의 염려는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하는 의식주에 대한 걱정이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걱정을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는 불신자들의 삶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의식주에 대한 염려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는 새를 먹여 살려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는 데서 오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세상 염려는 하나님의 감화력을 약화시켜 신앙의 성장을 가로막는 가시떨기가 된다.
재리의 유혹은 물질적 가치에 대한 집착과 추구로 신자의 영적 필요를 소외시킴으로서 영혼의 성장을 가로막는 가시떨기가 된다.
재물은 인간으로 하여금 부유해질수록 축적욕을 가중시키는 반면 그 인격에서 관대성을 감소시키고 그 자리에 비정한 마음을 채워놓는다. 신앙에 있어서 이 '가시떨기'인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은 앞에서의 돌밭인 환난과 핍박보다도 더 위험한 것이다.
왜냐하면 환난과 핍박은 외적요인 이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은 내적 요인이기 때문이다.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가 얼마동안 성장하다가 가시떨기에 의해 그 성장이 중단되고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신앙적인 장애를 극복하지 못하고 지속적인 성장을 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현상이다. 신앙은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에 가기까지 지속되어야하는 생명활동이므로 결코 일시적으로 있다가 없어지거나 단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지속적으로 성장해야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온전한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기까지 꾸준히 성장해야 한다고 하였다.(엡 4:13)
신앙의 지구력 그것은 결실을 위한 성령의 능력이다.
3. 좋은 땅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 결실을 맺는다고 하셨다. 그것은 말씀을 듣고서 깨닫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는 말씀이 아니라 깨닫는 말씀이다. 말씀을 깨닫는 마음은 믿는 마음이다. 정직하고 진실된 마음이다. 순수하고 선한 마음이다.
이러한 마음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내적 사역을 방해하지 않기 때문에 말씀의 성장에 옥토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성령의 은혜는 이러한 마음 속에서 말씀이 잘 성장하여 결실 하도록 길가와 같은 굳은 마음과 돌밭과 같은 장애 요소를 제거해 주고 가시떨기와 같은 세속적 염려와 물질적 탐욕을 정화시킨다.
성령의 감동은 말씀이 결실 하도록 수욕과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인내력을 갖게하고 항상 끊임없는 열정으로 헌신하게 만든다.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서 좋은 땅과 같은 마음 속에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함으로서 (갈5:22-23)
신자를 성결되게 하고 그 신앙적 인격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역사 하신다.
이처럼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다.
열매를 많이 맺는 `좋은 땅'으로서의 모범이 된 신자는 교회 역사상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신약 성경에서 우리는 베드로와 바울을 그 대표적인 인물로 꼽을 수가 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영생의 말씀으로 이해했으므로 그리스도의 대사도요 수제자가 될 수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예루살렘과 온 유대 땅에 세우는데 중심 역할을 함으로서 신약 교회의 위대한 초석이 되었다. 신약 교회의 성장과 발전을 말할 때 결코 베드로를 빼놓을 수가 없다.
바울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부르심을 받은 사도이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나 이방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이 말씀처럼 온 생애를 이방인 선교에 헌신하였다.
그는 소아시아 일대와 헬라와 로마 세계에 이르기까지 많은 교회를 설립함으로서 그의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하였다.
가라지의 비유 (마 13: 24-30, 36-43)
1. 좋은 씨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는 교회 안에 선악이 함께 공존하는 실상을 가리키신 말씀이다.
이 비유에서 좋은 씨를 뿌린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고, 밭은 세상이며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예수께서는 설명하셨다. 그리고 '가라지'를 심는 자는 마귀이고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며 추수 때는 세상 끝이고 '추수꾼'은 천사들이라고 설명하셨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좋은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켰으나 여기서는 '좋은 씨'가 천국의 아들들로 설명되고 있다. 그리고 좋은 씨를 이 세상인 밭에 뿌리는 사람은 '인자' 곧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단순히 대속 사업만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씨를 뿌리기 위해서 오셨다.
이것은 구속 사역과도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구속 사역이 아무리 훌륭하고 위대한 것이라 할지라도 씨 뿌리는 일, 즉 대속 사역의 은혜를 받을 자들을 선택하는 일이 없이는 무의미하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삼 년 공생애 기간을 가지셨고 이 때에 좋은 씨앗을 뿌리셨다. 예수께서 뿌린 씨앗은 매우 좋은 씨앗이어서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복음의 결실을 맺었다.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 즉 성도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좋은 씨가 정선된 씨앗이듯이 성도는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선택한 자들이다.
좋은 씨가 유익한 씨앗이듯이 성도는 모든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선한 자들이며, 좋은 씨가 혹한에도 잘 견디듯이 성도는 박해와 환난 가운데서도 잘 인내한다.
그리고 좋은 씨가 생명력을 가지고 있듯이 성도는 성령에 의하여 중생하고 생명의 부활을 하는 자들이다. 이처럼 좋은 씨는 하나님 아버지에 의하여 선택되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하여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이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건설을 위한 가장 좋은 씨앗들이다.
2. 가라지
'가라지를 뿌리는 자'는 마귀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39) 이 마귀는 하나님의 종들이 자고 있는 사이에 곡식 밭에 가라지를 뿌리는 자들이다.
원래 마귀는 에덴 동산에서 부터 가라지를 뿌렸던 자이다. 에덴 동산의 가라지는 하와였다. 다시 가인은 아담 가정의 가라지로 뿌려졌으며 아브라함의 가정에서는 이스마엘이, 이삭의 가정에서는 에서가 가라지로 뿌려졌다. 가인은 아벨과 함께 자랐으며 이스마엘은 이삭과 함께 자랐고 에서는 야곱과 함께 자랐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마귀는 열 두 사도들 가운데 가룟 유다를 가라지로 뿌려 다른 사도들과 함께 자라게 하였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을 자라게 할 때에 마귀는 그 속에 가라지를 뿌려 놓아 곡식과 함께 자라도록 지금도 역사하고 있다.
참 신자와 거짓 신자를 신자들 자신은 잘 구분하지 못하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들은 분간할 수가 있다.(27)
이처럼 마귀는 그리스도의 사도로 광명의 천사로 의의 일꾼으로 위장하는데 능한 자이다.
신령한 교회는 성령에 의하여 중생한 참 성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는 하나님만이 알고 계시며 인정하시는 무형 교회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유형 교회는 중생한 참 성도와 중생하지 아니한 거짓 성도가 함께 공존하는 교회이다.
이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바로 가라지는 이 유형 교회 안에서 중생하지 못한 성도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들은 평소에는 그 본색을 잘 드러내지 않으나 결정적인 시기가 오면 거짓 스승, 거짓 목자, 거짓 그리스도로 그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들 교회 안에 있는 적들은 교회 박의 적들보다 더 위험한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보호색으로 위장하고 있으면서 그 해독을 암암리에 교회 안에 퍼뜨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교회의 믿음과 사랑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분쟁을 일으키며 참 성도들이 희생과 봉사를 할 때 그들은 이권을 장악하고 자기 이익을 도모한다.
3. 추수 때까지 연기되는 가라지 심판
이 비유에서 주인은 종들이 가라지를 뽑겠는가하고 물었을 때 추수 때까지 그냥 두라고 대답하고 있다. 교회의 주인은 그리스도 시며 그 종들은 하나님의 종들을 가르키고 추수 때는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시기 위하여 재림하시는 때이다.
하나님은 그 때까지 유형교회안에 참 성도와 거짓 성도들을 공존하도록 섭리하시고 계신다. 왜냐하면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런 염려를 하시는 것은
1. 가라지를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이 주의 종들에게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완전한 것이 못되기 때문에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을 뽑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가 없기 때문이며
2. 거짓 성도는 참 성도의 믿음과 인내를 시험하기 위하여 필요하며
3. 참 성도들의 사랑과 봉사를 시험하기 위해서이며
4. 그들의 겸손과 충성심을 시험하기 위해서이다.
5. 뿐만 아니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와 대항할 수 있는 용기를 연단 시키시기 위하여 필요하기 때문이다.
가라지를 거두어 불사르는 때를 추수 때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추수 때는 세상 끝날 이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 끝날은 그리스도께서 심판 주로 재림하시는 때이다.
겨자씨의 비유 (마 13: 31-32)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겨자씨는 볼펜으로 점을 찍어 놓을 정도로 모든 씨 중에서도 가장 작은 씨입니다. 그런데 이를 밭에 심으면 4∼5m나 되는 큰 나무로 자라나 피곤하고 지친 새들이 찾아와 깃들어 안식을 얻습니다.
성경에서 큰 나무는 큰 왕국을 상징합니다.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인다는 것은 수많은 나라와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천국 안에 들어와 영적 쉼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겔17:23, 31:6).
겨자씨 한 알의 비유는 하나님의 역사는 처음 시작은 작고 미미하지만 그 안에 생명이 있어 인류 역사에 큰 영향력을 미칠 만큼 크게 자란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인 성장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처음부터 크고 장엄하게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75세의 아브라함 한 사람에게 믿음의 씨를 심으심으로 복음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역사는 점점 자라나 후에는 큰 민족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말구유에 초라하고 무력한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이는 당시 천하를 호령하던 로마 제국과 비교해 볼 때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생명이 있었기 때문에 점점 자라나 마침내 로마를 정복하고 세계를 정복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양성 역사도 겨자씨 한 알과 같았습니다. 제자들의 대부분이 학벌도 지위도 없는 어부들이었고 숫자도 많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수의 12명의 제자들에게 믿음의 씨를 심었습니다. 당시는 아무도 이 역사를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 양성 역사는 점점 자라나 마침내 온 세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나무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는 세계 선교에 대한 불타는 환상이 있었습니다. 그는 죄수의 몸으로 사슬에 매여 로마에 가서 셋집에서 1대1 역사를 하였습니다. 이 역사는 당시에는 마치 태평양 한 가운데 돌을 던지는 것처럼 무모하고 무의미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셋집에서 한 1대1 역사는 생명력이 있어 점점 자라나 마침내 AD 313년에는 거대한 로마 제국을 복음으로 삼켜 버렸습니다.
U.B.F복음 역사도 처음에는 작고 미미하여 짓밟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었기 때문에 점점 자라나 37년이 지난 지금은 본국 90개 지부와 세계 90개국에 영향력을 끼치는 모임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겨자씨 한 알의 비유가 제자들에게 주는 뜻이 무엇일까요?
제자들은 거대한 로마가 지배하는 세상에 살면서 크고 힘있는 역사를 동경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기적적으로 당장에 크게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눅19:1). 이 때문에 그들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작은 역사에 관심을 가질 수 없었고 특히 한 사람을 인내심을 가지고 도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겨자씨 한 알과 같이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에서 서서히 크게 성장하기 때문에 인내심을 가지고 가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양들과 말씀 공부를 하면서 오랫동안 변화가 없는 것 같이 느껴질 때 조급한 마음이 생겨 땅을 파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때가 되기도 전에 결단을 촉구하고 양들의 목을 잡아 뽑게 됩니다. 그러면 그 마음에 자라고 있던 말씀의 씨는 죽어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농부의 심정으로 참고 인내하며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때가 되면 자라 열매를 맺고 큰 거목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 한 알의 역사입니다.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작은 것 하나를 귀히 여길 줄 아는 영적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커다란 각광을 받지 못하는 두 목사님이 앉아서 자신의 피곤한 목회 생활을 이야기했습니다.
한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나는 지나간 3년 동안 사역을 했지만 사실 진정한 의미에서 거듭난 성도는 로버트 마펫이라는 청년 한 사람 밖에는 아직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또 다른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나는 최근에 우리 교회에서 한 주간 동안 부흥회를 가졌는데 커다란 기대를 걸고 이 집회를 인도했지만 한 사람 밖에는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수 년 후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한 목사님을 통해서 3년만에 얻었던 한 명의 결신자 로버트 마펫은 아프리카 선교의 기초를 놓았던 선교사가 되었고, 일주일간의 부흥 집회를 통해서 얻었던 유일한 결신자인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대륙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불을 지피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의 작은 겨자씨로부터 시작됩니다.
누룩의 비유
(마 13: 33)
1.눈에 뜨이지 않는 누룩
1.1.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세상에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우리는 보통 눈에 보이는 것 시각적인 것에 매여 살기가 쉽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을 무시할 수가 없으며 오히려 그것들이 더 큰 힘이 있는 것들이 많다.
우리는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히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삶의 방향과 역사를 섭리하시고 주재하고 계신다. 따라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내면적인 것들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하나님 앞에 더욱 신실한 삶을 영위해 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1.2. 누룩의 확산력
인간이 의로워지려면 반드시 외부로부터 어떠한 능력이 투입되고 확산되어야 한다. 누룩은 밀가루 반죽 안에 투입된다. 그래서 온 덩어리가 다 발효될 때까지 확산되는 것이다. 이것이 누룩의 본질이요 생명력이다.
이는 하늘나라 복음의 확산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은 누룩처럼 은밀히 점진적으로 그러나 확실하게 확산되어 나간다. 누룩의 세포 분열이 기하급수적인 것처럼 우리의 복음도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넷으로 퍼져 가는 누룩의 확산력을 본받아야 한다.
1.3. 누룩의 의미
우리는 밀가루 반죽에 누룩을 조금만 넣는다. 누룩이 들어간 반죽과 그렇지 못한 반죽과의 외견상의 차이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의 모습은 너무나도 엄청나다.
이렇게 부풀어 가는 과정은 교회의 확장과 복음의 확장에 대한 상징이며 하나님 나라의 표상이다.
누룩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성취하시려 의도하신 하늘나라의 변혁적인 모습으로 힘차고 강한 생명력과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시는 말이다.
처음에는 적고 미미한 누룩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토록 왕성하게 확산되는 과정은 하나님 나라의 성장의 법칙을 보여주고 있다.
2. 변화시키는 누룩
2.1. 변혁의 필요성
일정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누룩은 놀라운 모습으로 세포 분열을 한다. 이것은 파괴와 조성, 부패와 성장, 죽음과 생명의 원리가 된다. 부패한 인간이 회개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한 순간에 성화될 수 없는 것이며 한 걸음씩의 변화 속에서 신성해지고 변화되어 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변화의 원리이다. 누룩이 반죽 안에서 변화되어 가듯 우리의 부패된 육신이 믿음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은 천국에 비유될 수 있으며 또 변화는 이러한 의미에서 그 필요성이 있다.
2.2. 변화된 모습들
성도들은 항시 변화된 모습을 가져야 한다.
자비롭지 못한 자는 변화되지 못한 손을 가지고 있으며, 겸손하지 못한 자는 변화되지 못한 무릎을 가지고 있는 것이며, 또 불경스러운 말을 하는 자는 변화되지 못한 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죄를 짓고도 편안한 자는 변화되지 않는 마음을 갖고 있는 자이다.
이처럼 외부로 나타나는 행위들은 우리 내부 변화의 정도를 말해 주는 것이다. 누룩을 반죽에 넣듯이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넣어 영적 변화의 삶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여야 한다.
그것만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모습이며, 변화된 모습들을 통하여서만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2.3. 살아 있는 누룩
화학자들은 누룩의 발효 과정을 반죽 속에 있는 당분의 분해와 탄산의 유리라고 한다. 이것은 누룩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미묘한 세포군 때문이다.
이 세포군이 무수한 세포 증식으로 확산되어지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처럼 살아서 확산되는 것을 천국에 비유하신 것이다. 천국은 누룩과 같아서 살아서 인간의 구원을 위한 복음과 함께 역동하는 것이다. 누룩이 살아서 활동할 때에 누룩으로서의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복음이 살아 있고 확산될 때 천국은 우리에게 참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다.
3. 활동적인 누룩
3.1. 누룩의 활동
누룩은 확산되는 특징이 있다고 말씀드렸다. 점진적이면서도 쉬지 않는 특성 그래서 전체를 동화시키는 활동을 한다. 누룩이 이처럼 활동을 하듯이 하나님의 말씀도 활동을 하신다.(히4:12)
우리의 생활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랑과 이해의 말씀으로 깊은 곳에 담겨져 있어야 한다.
말씀은 지적인 체계나 문헌 속에 가두어 두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또한 누룩은 부드럽게 해주는 작용을 한다. 굳은 반죽에도 누룩은 깊이 침투하여 부드러운 빵을 만들어 낸다. 하나님의 말씀도 굳은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변화시키는 활동을 한다.
3.2. 하나님 나라의 내적인 성숙
겨자씨의 비유가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숙과 복음의 확산에 대한 언급이라면 누룩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내적 성숙에 대하여 말씀하여 주신 것이다. 누룩은 보이지 않는 은밀한 곳에서 작용하면서도 확실한 변화를 보여준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에 대한 역사와 작용도 은밀하지만 확고한 변화를 주며 하나님 나라의 내적 성숙 작용을 꾸준히 도모한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자기를 나타내지 않고서 은밀히 숨어서 선한 일을 해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표면적으로는 보이시지 않지만 항상 경이로운 활동을 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내적 성숙을 위하셔서 누룩과 같이 확실한 힘을 발휘하고 계신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에 따른 외적 성숙도 중요하지만 내적 성숙을 위한 말없는 노력도 필요하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확고한 초석이 되어 공중의 많은 새가 깃들일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과 내적 성장 중에 어느 것 하나를 강조하거나 소홀히 할 때도 하나님의 나라는 올바른 모습으로 성장하지 못한다.
이 둘은 반드시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자라가야 한다.
우리의 생활을 보면 때로 균형 잡히지 않고 치우친 길을 갈 때가 많다.
우리의 삶이 곧 하나님 나라의 장이라고 할 때보다 세심한 하나님 나라를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보화의 비유
(마 13: 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미국의 부호 록펠러의 변화
그는 가난한 사람, 돈을 버는데 미친 사람, 돈을 쓰지 않고 모으기만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돈을 벌어 사업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배를 사서 고철을 실어 나르는 사업을 하고 있던 어떤 날 사무실에 전화가 걸려왔다.
배가 짐을 잔뜩 싣고 오는데 폭풍우를 만나서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부랴부랴 보험을 들었다.
보험 회사에서는 왠 일인가 하였다. 그런데 배가 파선되지 아니하고 무사히 귀환하였다. 록펠러는 보험료로 낸 500달러가 아까워서 몇일 동안 밥을 못 먹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악착같이 돈을 벌어서 상당한 부자가 되었음에도 그의 돈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었다. 그는 많은 사람의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나 가리지를 않았다.
그는 기상천외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할 수 있는 대로 은행 빛을 얻어서 미국에 있는 석유를 사들이기 시작하였다. 십여 일 동안 있는 대로 사들이니 미국에 있는 석유가 동이 나고 말았다. 그는 이 때를 이용해서 자기 회사 석유를 15배를 받고 팔아서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되었다.
미국에서 이 일을 계기로 트러스트 방지법이 생겨날 정도였다.
그러나 그도 욕심에 이끌려서 사니 몸에 병이 생겨서 죽게 되었다. 의사는 그에게 처방을 내리게 되어진다. 그는 하루에 4천만원 씩을 버는 부자였지만 먹는 것은 천원이 넘으면 안되었다. 살기 위한 열 가지 이상의 규칙이 내려졌다.
그는 죽음 앞에서 비로소 자기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보잘것이 없는가를 알게 되었고 믿음을 찾게 되어진다. 믿음의 놀라운 능력과 새로움을 알게 되었고 또 다른 세계가 있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된 것이다. 그는 이제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 참다운 삶의 길을 찾게 되었고 록펠러 재단을 세워서 보람있는 여생을 보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을 헛되게 보람없이 살다가 죽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예수 안에서 참된 삶의 길을 찾도록 하신 것이다. 예수를 통하여 주시는 삶의 축복은 끝이 없다. 길, 진리, 생명, 목마르지 아니하는 샘물, 성령의 인도와 내주, 함께 하시는 동행의 은혜...
세상의 좋은 것들은 하나가 좋으면 하나는 좋지 않고, 목마르게 갈망하다가 얻었지만 곧 실망하고 무의미해지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만나고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면 삶의 모든 은혜가 위로부터 끝없이 임하게 되어진다.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 보면 신앙의 기쁨이 무엇인가 신앙의 값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게 되어진다.
어떤 사람이 있었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었고 아침에 일어나면 일을 하고 저녁에는 쉬고 또 일어나서 일하고 또 다시 쉬고 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좀 잘되면 좋고 잘 안되면 기분이 나쁘고 하나 더하기 하나는 하나요 둘 더하기 둘은 넷인, 그런 계산 속에서만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는 본문의 말씀을 보니 밭을 가는 사람으로 등장을 하고 있다.
그것도 남의 밭을 가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일을 하면서도 무슨 재미가 있었겠는가? 그는 빨리 일이 끝나기만을 바라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열심히 일을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되어진다. 밭을 갈다가 쟁기에 걸린 어떤 물체를 발견하게 되어진다. 그것은 놀라웁게도 보화였다. 보물 단지를 발견한 것이었다.
그것의 값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는 거기서 숨이 멈춘 것 같은 흥분과 기쁨을 맛보게 되어진다. 그리고서는 다시 그것을 조심스럽게 그 땅에다 묻어 두고서는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천국으로 비교를 하셨다. 천국이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라면 이것은 바로 신앙인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신앙의 귀중한 몇 가지 교훈을 받게 되어 진다.
1. 의미 없이 살아가며 참다운 신앙을 알지 못하는 신앙생활의 단계이다.
농사꾼이 그냥 밭을 가는 것처럼 인간적인 보람과 기쁨은 있지만 자기 생애에 있어서 신선하고 놀라운 감격이 없는 그런 삶, 그런 신앙이다.
처음에 예수를 믿을 때--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 새로운 세계를 접하는 신선함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여기에서의 삶은 주변의 여건에 따라 계속하여 바뀌는 생활이다.
예.....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 , 거듭나지 못한 교인
신앙 생활은 밭을 가는 생활이다. 기도, 전도, 봉사, 충성, 헌신.........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깊이 갈았다. 신앙생활의 참의미를 발견하지 못했을지라도 열심히 해야 한다. 그러면 보화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2. 보화를 발견하고 기뻐하는 신앙인이 된 단계
주변의 환경에 따라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살아가는 상태에서 보물 단지를 발견하고서 이 사람은 새로운 삶의 전환을 가져오게 된다.
보화를 발견한 사실은 너무나도 놀라운 그의 인생을 일시에 바꾸어 버리는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다.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면서도 그에게는 너무나도 좋은 사건이다.
보화를 발견한 다음에 그에게 나타난 현상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바로 기쁨이다. 이처럼 신앙은 성도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다. 성령의 사역은 성도를 기쁘게 한다.
"강물같이 흐르는 기쁨 성령 임하심이라."
성도는 이 세상 그 어떤 근심, 염려, 실패, 고난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이 있어야 한다. 천국을 소유한 기쁨이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의해 쉽게 덮이어 버린다면 그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할 수 없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여부는 이 기쁨의 내적 소유의 여부에 달려 있다.
3.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밭을 사는 단계
그 밭을 사기까지는 아직 보화가 자신의 소유가 아니기에 이 사람은 밭을 사기 위하여 자기의 소유를 파는 것이다. 소유를 파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괴로운 일이다. 사업이 잘 안되어서 논밭을 팔아서 사업 자금을 하게 되면 괴롭다. 먹고 살 것이 없어서 세간 살이를 파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렇지만 자기의 소유를 팔아서 더 좋은 집을 사고 더 좋은 땅을 산다면 파는 것이 괴로운 일이 아니라 즐거운 일이 된다.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는 어리석은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사는 자만이 그 비밀을 알고 있다. 천국은 이와 같은 것이다. 내가 세상의 모든 것 다 잃어도 주님 얻었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나이다 -이것이 참다운 신앙인 것이다.
주님 안에 모든 것이 있으니, 보화만 손에 넣으면 소유의 여러 배를 살 수 있으니 걱정이 없는 것이다.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의미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걸어가는 이 믿음의 길이 정말로 보화와 같은 것으로 믿고 알고 있느냐 하는 자신의믿음의 분량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신앙을 알기를 돌처럼 아는 사람이 있다. 나무나 쇳조각 정도로 아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 이것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지 아니하고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얻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기쁨도 없고 때로는 지겹고 억지가 되기도 한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자기의 소유를 다 팔더라도 신앙을 소유하는 것이 훨씬 더 자신에게 유익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막 10:29-3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포도원 품꾼의 비유
(마 20: 1-16)
1. 이 비유의 동기
베드로의 질문 - 젊은 관원의 사건과 근심하며 돌아간 젊은이...
주님은 베드로의 질문에 답변하셨다. "세상이 새롭게 되어..."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의 질문에서 매우 잘못되고 거짓된 어조를 탐지해 내셨다. 그래서 그를 꾸짖고 책망하고 가장 심각하게 경고하시기 위하여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이 비유의 해석의 열쇠는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고..." 먼저 된 자가 누구인가? 질문자인 베드로를 위시하여 제자들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열성적이며 충성스런 중진 일군들, 그렇게 봉사하고 충성한 것이 잘못이고 나중되는 것이 좋은 것이란 의미가 아니다. 이런 먼저 된 자들에게도 위험이 따른다는 의미이다. 이런 위험성이 없는 기독교인은 없다. 우리에게는 원수요 영혼의 대적자가 있기 때문이다. 초신자에게만 위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숙한 그리스도인에게도 위험성이 항상 따른다.
2. 이 비유중에 우리가 관심을 집중시켜야 하는 원리가 하나 있다.
그것은 기독교인의 삶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은혜라는 것이다. 이 놀라운 은혜의 원리에 맨 마지막에 온 자들도 처음부터 일한 자들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생각할 수 있다. 나이가 늙어 개종한 자들에게 종종 찾아 드는 낙심, 너무 늦었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생의 늦부분에 개종한 사람들은 때때로 구원이 그에게 좀 늦게 임하였고 많은 시간을 낭비한 것을 미끼로 삼는 마귀의 유혹에 걸려들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우리 주님이 열한시에 그들을 불러 일터로 보낸 사실이 커다란 위로가 된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의 강조점은 오히려 먼저 온 사람들에게 있다. 이 비유의 중요한 목적은 먼저 된 자들에게 교훈 하시고 엄숙한 경고를 하시는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다.
3. 포도원에 이른 아침부터 보냄을 받은 이 사람들은 왜 마지막에는 그렇게 슬픈 인물로 나타났습니까?
① 2절 "저가 품꾼들과 약속하여..." 맨 처음 사람들의 경우에만 되어진 것.
그들은 ㉠ 계약을 맺으려고 노력하는 경향
㉡ 어떤 것들을 명문화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 곧 그들이 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너무나도 의식하고 있다. 어느 의미에서 일하는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자들이다.
② 그들이 자신의 일을 평가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도 역시 평가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한 모든 것을 주의 깊게 간직하여 둔다. 그들은 얼마나 시간을 소비하였으며 얼마나 오랫동안 일을 하였으며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 - 종일 더위와 수고를 견딘 것 - 을 간직한다. 이 사람들은 최초의 잘못된 태도 때문에 즉 그들이 은혜의 원리를 잊었기 때문에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받을 것을 기대하였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더 받을 자격이 있는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들은 완전히 논리적이었다. 그들은 더 많이 받을 자격이 있고 더 많이 받아야 한다는 감정을 갖고 더 많은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더 많이 받지 못했기 때문에
③ 그들은 불평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행복과 기쁨은 다 사라져 버렸다.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기뻐하는 대신에 비참해지고 불평하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비극적인 일입니까? 이것은 그들이 모든 것은 은혜로 되어진다는 것을 잊어버린 사실에서 결과되어진 것이다.
④ 결국 먼저 온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경멸과 다른 사람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질투도 포함된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탕자비유중 맏아들의 경우. 이 경향은 충실하고 가장 훌륭한 일을 하는 기독교인들에게 간교한 방법으로 들어와 시험한다. <다른 사람들을 많이 주는 것은 주는 자의 뜻인데> 내것이나 받으면 되었지 남을 간섭하고 질투하는가?
⑤ 가장 심각하고 무서운 일은 그들의 마음속에 집주인이 불공평하다는 감정을 가진 점이다. "네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 세어 보아라. 그런데 네가 얻은 것은 무엇이냐. 다른 친구들을 보아라. 그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지만 그래도 그가 얻은 것을 보아라"라고 마귀가 유혹한다.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다니 - 한 시간만 일한 사람과 똑같이, 그래서 하나님은 불의 하신 분이라고 느낀다.
4. 이에 대한 치료책은 하나님의 왕국을 지배하는 원리를 이해하는데 있다.
하나님의 왕국은 우리가 항상 알고 있는 것과 같지 않고 전혀 다른 무엇이라는 인식이 필요. 과거의 생활 원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나님의 왕국 안에서 나의 모든 생각은 달라져야 한다. 나는 옛생각의 개념들을 가지고 다녀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매매나 권리의 개념을 가지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내가 이것을 하고 저것을 했다 해서 나는 무엇인가 대가로 받을 것을 기대할 권리가 있다고 논쟁하는 것처럼 잘못된 영은 없다.
{예} 자동판매기식. 내가 무엇을 했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을 얻을 자격이 있다. 기도, 헌금, 봉사. 우리는 매매하는 정신에서 벗어납시다.
"만일 내가 이것을 하면 그러면 저것이 일어날 것이다"라는 식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무슨 일이나 권리가 없다는 것을 인식. 성경에는 상급에 대하여 가르친다. 상급조차도 은혜에 속한 것이다 - 주님은 그들에게 주어야 할 필요는 없으시다.
5. 하나님과 흥정하지 말자.
하나님과 약속을 맺으려 한다면 그것밖에 더 이상의 것을 얻을 수 없다. 나중 온 자들은 약속하지 않았다. 상당하게 주리라. 그들도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 우리 하나님의 은혜에 맡기면 우리가 생각해 본적도 없는 많은 것을 틀림없이 받게 된다. 우리 주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너희 상을 이미 받았노라고 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여졌다. 그것이 그들의 원하는 바였고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전부였으며 더 이상 가질 수 없다.
6. 우리는 나의 일에 대한 기록이나 계산을 하지 말자.
하나님으로 하여금 계산을 기록하도록 하자. 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자. 계산을 기록하느라고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계산방법은 우리들의 물질적인 전망과는 완전히 정반대이다. 나중 된자... 모든 것이 뒤바뀐다. 전세계가 은혜로 인하여 뒤바뀌어진다. 연약한 가운데 강단으로 나아가나 능력으로 끝을 맺는 경우가 있다. 자신감을 가지고 나아갔다가 바보와 같은 느낌을 가질 때가 있다. 그러면 낙심된다. 결과를 의식하지 말고 일만 하라 기록은 하나님이 하신다.
악한 농부의 비유 (마 21: 33-41)
1. 실과를 받으러 온 주인의 종들
(마21:33)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마21:34)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① 결실해야 할 이유
예수님의 비유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이스라엘 민족의 실제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포도원은 이스라엘 민족을 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즙짜는 구유와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었습니다.
필경 심은 포도나무는 극상품 포도나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무조건 열매를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열매 맺힐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은혜를 공급하여 주신 후 열매를 찾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거 이스라엘 나라에도 그러하셨듯이 오늘의 교회와 성도들에게도 충분한 은혜를 주시고 열매를 요구하십니다.
예) 달란트 비유(마 25:14-30)
② 포도원의 농부들
비유 속에 나오는 포도원의 농부들은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포도나무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 돌보고 가꾸어야 할 의무가 있고 이러한 그들의 돌봄을 통해 백성들은 믿음의 삶을 통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헌신과 충성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열매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하고 부패했던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은 포도원인 백성들을 잘 가꾸고 돌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 가운데서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께 드리는 아름다운 영광까지 가로채는 범
죄를 자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예) 삼상 2:12-18, 사 1:13)
③ 종들을 보낸 근거
포도원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실과 때가 되어 종들을 보내었는데 그 종들은 선지자입니다. 종들을 보낸 이유는 포도원을 세로 주고 갈 때에 체결한 합리적인 계약 때문입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종들을 예우하거나 합당한 소출을 계산해 내기보다는 오히려 포악한 행동으로서 종들 중에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습니다.
그 후에 주인이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어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냈으나 저희에게도 그렇게 행했습니다.
2. 공경 받을 주인의 아들
(마21:37)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마21:38)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① 주인의 마지막 기대
보통 주인이라면 처음 한번 주인을 배신할 때 그들을 처치했을 터이지만 이 주인은 매우 관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기대를 모아 '내 아들'이면 공경하리라 여겨 아들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주인의 기대와는 전혀 어긋나게 이들은 아들까지 포도원 밖으로 쫓아내어 죽이고 말았습니다. 여기에서 주인의 아들이란 유대의 사회적 배경에서는 주인 자신을 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을 동일하게 보고 이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도 주인의 아들로 공경을 받아야 마땅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오히려 주인의 아들이라는 이유를 빌미삼아 상속자니 죽이고 유업을 차지하자는 속셈으로 악을 행하였던 것입니다.
② 농부들의 악행 이유
농부들이 정당한 계약을 어기고 종들을 많이 해하였고 끝내는 아들까지 죽이게 된 데에는 농부들의 욕심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소출을 떼어먹겠다는 속셈으로 한 것이었으나 나중에는 상속자를 죽이고 유업을 차지하겠다는 욕심이 결국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낳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욕심은 죄를 낳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기자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풍조에 찌들어 할 수만 있으면 많은 것을 움켜쥐려는 사악한 욕심에 포로된 현대 신앙인들에게 경종이 되는 말씀입니다.
③ 아들로 묘사된 그리스도
마지막으로 성밖에 끌어내어 죽임을 당하는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택하여 선민을 삼으시고 여러 선지자를 세워 말씀을 증거하여 열매를 얻기를 원하셨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온갖 박해로 하나님의 종들을 잔해하였고 마지막 예언자이시자 메시아의 도구이신 세례 요한까지도 헤롯의 권세에 의해 목베어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포도원에 보냄을 받은 상속자인 예수님께서 오셨지만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했습니다.
3. 권리의 상실
(마21:41)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① 당연한 결과
포도원으로 비유된 이스라엘 지도자와 백성들은 하나님의 종들을 합당히 여기지 아니하다가 결국은 하나님의 독생자를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기기에 이르렀습니다. 즉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은 멸망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뿌린 사악함의 결과인 것입니다.
분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예수님을 죽이라고 빌라도에게 요구하며 이르기를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마 27:25)라고 한 어리석은 말대로 예루살렘은 로마의 공격 하에 무너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후 이 천년 가까이 전 세계에 흩어져 유리 방황하는 백성이 되었으며 나치의 학대에 짓밟히는 버림받는 선민의 수모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② 이방에 넘겨진 복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농장을 관리하고 가꾸며 충성하기를 거절할 때에 하나님은 제사장과 장로들이 '제 때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를 줄지니라'라고 대답한 것과 같이 이방의 다른 농부들을 택하여 복음의 포도 원을 맡기셨습니다. 그 결과 오늘 전세계에 복음의 가지가 펼쳐졌으며 수많은 영혼 구원의 실과가 하나님께 돌려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방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베풀어진 구원의 은혜 때문입니다.
특별히 이것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한 결과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서 사명도 잃고 영생도 잃어 버렸습니다.
③ 경성해야 할 교회
이스라엘의 패역함을 지적하여 악행으로 인해 그들의 상실한 선민된 특권이 이방으로 넘어가게 되었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 속에서 오늘날 모든 성도와 교회,
교회의 지도자들은 경고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참 감람나무인 이스라엘이 합당치 않을 때 가차없이 잘라내시고 돌 감람나무인 우리들을 원가지인 그리스도께 접을 붙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겸허하게 '우리를 합당한 자로 열매를 맺고 있는가'를 자문해보아야 합니다.
(마21: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열 처녀의 비유 (마 25: 1-13)
주님은 우리를 10처녀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들 중에는 후회하는 5처녀가 있고 천국잔치에 참여하는 5처녀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속해야 되겠습니까. 후회하지 않는 지혜로운 5처녀가 되기 위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의 특징과 의미를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1. 이 비유의 특징은 주님은 자신을 신랑으로 비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본문의 배경은 당시 행해지던 결혼을 비유로 하신 말씀입니다. 마지막 때에 될 일들을 24장에서 말씀하신 후에 이어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때에 갗추어야할 성도의 신앙자세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비유란 그 말씀의 문자에 역사성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비유가 상징하는 뜻이 중요한 것입니다. 비유를 통하여 하시고자 하는 주님의 의도를 살피는 것이 비유 해석의 방법입니다.
결혼식의 주인공은 부모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신랑과 신부입니다. 결혼은 사랑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사랑 없는 결혼은 아무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비유를 시작하시면서 먼저 자신을 신랑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신랑으로 비유하신 이유는 그것은 바로 사랑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런 경향이 있지만 당시의 고대 사회에서는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여 프로포즈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습니다. 남자 쪽에서 먼저 적극적으로 신부를 찾아 나서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도 인간을 향한 적극적인 사랑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생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하셨습니다. 빌립보서2:8에는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일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생명보다 귀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가장 소중한 생명을 선물로 주시면서 까지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이 가득한 신랑이 바로 주님인 것입니다.
2.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는 교회의 성도들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처녀들은 신랑을 기다리듯 마지막 때에 주님을 기다리며 믿음생활을 하는 교회의 성도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10명입니까. 성경에서 7과 10은 완전수로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10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단순히 10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교회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숫자를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특별히 교회의 성도들을 처녀로 비유하신 의미는 무엇입니까. 교회의 순결성을 가리킨 것입니다. 깨끗하고 정결한 성도의 모습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하고 더러운 사단의 시험에 빠져서 자신의 영혼을 더럽혀서는 안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사단은 초신자들 만을 시험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광야에서 40일을 기도하신 후 성령이 충만하셨습니다. 영력이 충만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단이 그 때에 찾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사단의 시험은 교회를 얼마나 오래 다녔는냐,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느냐,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관계없이 시험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단의 시험을 당했었던 베드로는 그의 서신에서 말하기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근신하라는 말은 사단의 시험에 넘어져 더럽힘을 당할까 항상 조심하고 경계하라는 말입니다. 목회자든 성도이든 누구든지 근신하고 조신하지 않으면 사단의 올무에 걸려 마땅히 입어야할 세마포의 정결한 옷을 더럽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3.신랑은 신부와 언제 도착할 시간은 정확히 모르지만 약속이 되어 있었습니다.
신랑이 밤에 신부의 집을 찾아가는 것은 당시 사회 풍습이었습니다. 신랑이 신부의 집에 가서 신부를 데리고 온 후에 밤중에 결혼식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부는 단장을 하고 신랑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신랑은 그의 부모와 당사자에게 어느 날 밤에 오겠다고 약속을 하지만 특별히 몇 시에 오는지 정확히는 말하지 않습니다. 때는 알지만 정확한 시간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요14:2-3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살전4:16과 5:1-3에서 바울은 말하기를 주님께서 천사의 나팔소리와 함께 하늘로서 강림하시는데 그 날과 그 시기는 마치 갑자기 예고없이 찾아오는 도적과 같이 우리에게 임한다고 했습니다.
더 분명한 말씀을 보면, 마 24:36에 "그러나 그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분명 그 시기와 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마치 오늘의 비유와 같이 신랑이 오되 어느 시기에 올지 모르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4.신랑이 더디 오므로 10처녀는 모두 졸았습니다.
5절에 보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신랑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생각보다 신랑이 늦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처녀들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졸게 되었습니다. 지혜로운 처녀는 졸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졸았습니다.
마지막 때에 믿음생활을 하는 성도들의 모습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졸며 잔다는 것은 사단이 기승을 부리는 마지막 시대에 믿음생활을 하다보면 누구나 신앙생활에 낙심과 좌절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련한 자들만이 잔 것이 아니라 슬기 있는 처녀들도 졸았다고 했습니다. 혹 잠이 깨어있는 정도는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어쨌든 모두가 다 졸며 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할 것은 우리 주위에 혹 믿음 생활에 낙심한 자들을 사랑으로 돌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죄와 비난보다는 격려와 사랑의 훈계로서 대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말세 시대에 살다보면 나도 졸음이 올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절대 졸지 않을 것이라고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 생각보다 더디 오십니다. 그래서 그 때까지 서로 서로 버팀목이 되어 붙들어 줌으로 함께 천국의 혼인잔치에 이르러야 합니다.
5. 5처녀는 등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신랑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드디어 신랑이 왔다는 방울소리가 울렸습니다. 어서 나와서 신랑을 맞으라는 소리가 나게 된 것입니다. 처녀들은 허겁지겁 깨어나서 등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10처녀의 손에 있는 등불에는 불이 가물 가물 꺼져 가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심지를 건드려도 불이 붙지를 않습니다. 기름이 떨어진 것입니다.
당시의 등은 올리브 기름을 접시에 담고 그 안에 헝겊으로 심지를 만들어서 불을 붙이고 들고 다닐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랴부랴 기름을 사러 갔습니다. 10절에 보니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드디어 그녀들이 기름을 사가지고 왔으나 이미 신랑은 떠나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혼인집으로 뛰어가서 등불을 준비하고 왔으니 문을 열어달라고 간곡하게 외쳤습니다.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 그 때에 신랑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참으로 안타까운 장면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비유하기를 "미련한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6.그러나 반면 5처녀는 등불을 준비해서 신랑을 맞게 되었습니다.
신랑이 왔다는 소리에 잠을 깬 5처녀의 등에도 역시 불이 꺼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들은 곧 준비한 기름을 등에 부어 불을 밝히고 신랑을 만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련한 처녀와 슬기로운 처녀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슬기로운 5처녀는 신랑이 늦게 올 것을 대비해서 미리 기름을 준비했지만 미련한 처녀들은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다는 차이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름을 준비하라는 뜻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많은 설교자들이 이 본문의 핵심을 기름이 무엇이냐에 초점을 맞추고 설교를 합니다.
대부분 신학자나 설교자들은 이 기름은 성령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말세의 성도들은 기름이 충만한 것과 같이 성령으로 충만해 있어야 주님을 만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을 이해하면서도 자칫 교리 적인 면에서 혼동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분명 미련한 처녀들도 기름이 있었습니다. 다만 충만히 준비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신약성서 어디에도 성령이 충만하면 구원받고 성령이 충만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우리 안에 일단 성령께서 내주 하시게 되면 우리의 행위나 충만한 상태와 관계없이 우리는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렇다면 기름을 준비한다는 말씀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기름에 초점을 맞추지만 성경의 본문을 자세히 보면 기름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등"에 초점이 있습니다. 비유의 시작인 1절에, "천국은 마치 기름을 들고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기름을 준비하고 나갔다는 것이 아닙니다.
또 가장 클라이맥스가 될 수 있는 7절을 보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 새"라고 말씀합니다. 기름을 준비하는 목적도 결국은 등을 밝히기 위한 것 아니겠습니까. 신랑을 맞을 때 기름을 들고 나가야 합니까. 등불을 들고 나갑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등불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등불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성경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는가를 통하여 풀어보겠습니다. 시119:105의 말씀은 이렇습니다."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나이다" 그러므로 등불을 준비하라는 말씀은 어둠을 밝히는 등불같이 인간을 멸망으로 이끄는 어두운 죄악을 밝혀서 생명의 길로 이끄는 복음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말세의 교회에는 두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는 참 믿음이요 또 하나는 거짓믿음입니다. 본문의 비유대로라면 많게는 50%까지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에서도 나타납니다. 교회 안에 알곡이 있지만 분명 가라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참 믿음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하여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참 믿음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아니라 영접하는 것입니다.
마7:21-23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와서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 병도 고치고 귀신도 쫓았는데 왜 나를 모른다고 하십니까라고 항의합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내게서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믿음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욕심을 채웠던 사람들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교인들이 교회에 오면서 주님을 통하여 어떤 종교적인 위로와 이익만을 얻으려 합니다. 어려울 때는 믿음생활을 잘하다가 좀 나아지면 하나님을 떠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 가에는 관심이 없고 내가 주님을 통하여 무엇을 얻을 것인 가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진정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속죄의 복음을 믿는다면 그 믿음으로 말미암는 변화는 무엇입니까. "주님 나 같은 죄인을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제 과거에는 내 마음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겠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7.천국은 혼인잔치 같습니다.
10절에 보면 문이 닫히고 혼인잔치가 베풀어 졌다고 했습니다. 결혼은 사랑의 열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목적도 우리와 함께 영원히 거하는 것입니다. 혼인잔치의 풍성함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며 영원토록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이 영원한 혼인잔치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13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주님께서 이 비유를 통하여 하시고 싶으신 말씀의 결론입니다.
"성도들아 깨어 믿음의 등불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 저 문 밖에서부터 다가오는 신랑이 오는 방울소리를 듣지 못하고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믿음의 잠을 자는 사람은 없습니까. 아직도 주님을 위대한 성인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신 분입니다. 참 믿음은 말씀의 중심이며 빛되신 예수그리스도를 내 심령 가운데 영접하여 순종하는 삶입니다. 이제 깨어서 여러분의 등불을 보십시오. 믿음을 보십시오.
우리에게 마지막은 언제입니까.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때는 역사의 종말이지만 우리는 언제나 언제 하나님 앞에 갈지 모르는 개인적인 종말을 맞고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에게도 "보라 신랑이로다"하는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 그 때 밝은 등불을 들고 주님을 맞읍시다. 서로서로 격려하고 붙들어서 함께 천국의 혼인잔치에 참여합시다. 후회하지 않는 슬기로운 믿음의 자녀들이 됩시다.
달란트 비유 (마 25 : 14-30)
주인이 종들의 능력에 따라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각각 주고 먼길을 떠났습니다.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서 계산을 하는데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받았던 종은 열심히 일을 해서 받았던 돈의 갑절의 이윤을 남겨 주인 앞에 내놓았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기뻐서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리니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25:21) 하며 칭찬을 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주인에 대한 두려운 마음을 갖고 있었던 까닭에 그 돈을 활용하지 못하고 그대로 땅속에 묻었다가 주인이 돌아왔을 때 꺼내 놓았습니다. 주인은 그것을 보고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는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에게서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25:26-28) 하며 심히 책망을 했습니다. 결국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문 밖으로 쫓겨나 이를 갈며 통곡했다는 것이 이 비유의 줄거리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달란트의 많고 적음의 문제, 금전의 가치에 대한 문제 이전에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와 시간을 잘 활용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완수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우리 신앙 생활은 기회와 시간과 매우 중요한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말에는 시간이라는 단어가 한가지 뜻으로만 풀이되어 있지만, 헬라어에는 시간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 두 가지로 나뉘어 쓰이고 있습니다.
하나는 '크로노스'라는 말인데 이것은 '흐르는 시간' 을 의미합니다.
연대로 보는 시간 관념입니다. 내가 30세가 되고 50세가 되고 80세가 됐다는 말은 크로노스의 시간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감옥에 갇힌 사람이 출옥할 날을 손꼽아 세는 것, 잠을 이루지 못해 고통을 받으며 빨리 아침이 되기를 기다리는 것과, 교통체증 때문에 제시간에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해 차 안에서 시계를 보며 초조하게 있는 것모두 크로노스의 시간 개념입니다.
또 하나는 '카이로스'라는 말인데, 이것은 질적인 시간으로서, 의미 있는 시간, 가치있는 시간, 보람있는 시간, 생동하는 시간,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를 맺는 영원한 시간, 감격의 순간들이 모두 이에 속합니다.
크리스챤의 삶은 얼마나 오랜 세월을 살았느냐 하는 것보다도 시간 시간을 얼마나 값있고 질적으로 의미 있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그 신앙 생활을 평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나 있는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크로노스의 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바꾸지 못했기 때문에 주인으로부터 책망을 받았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의 실패 원인이 무엇인가를 함께 생각하면서 영적인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1. 받은 달란트를 소중히 여기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능력에 따라서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어떤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를 과소평가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 가정의 곤란한 것, 잘못된 것은 확대해 보면서 다른 가정의 모든 것을 좋게 생각하는 것은 미성숙한 삶의 태도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가정, 자기에게 주어진 자식, 자기에게 주어진 아내, 남편, 직장 등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사람은 한 달란트 받았던 종과 같이 실패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불평과 원망과 구실만을 찾습니다. 우리 나라가, 우리 사회가, 우리 가정이 잘못됐기 때문에 내가 못산다고 하면서 모든 책임을 회피하고, 또한 자기에게 주어진 무한한 가능성과 달란트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여 실패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농부가 오랫동안 좋은 농장을 가꾸면서 행복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갑자기 자기의 농장이 싫증이 나서 이것을 팔고 다른 환경의 새 농장을 사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부동산 중개소에 자기의 농장을 내놓았습니다. 부동산 중개소에서는 여러 곳에 광고를 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넓고 기름진 땅, 좋은 농가, 큰 곡식 창고, 이상적인 위치, 최신식 농기구를 갖춘 농장을 팝니다."
신문 광고를 보다가 이 농부는 "이 농장이 바로 내가 원하는 농장이구나"하고 생각하고서 위치를 자세히 보니까 바로 자기 농장을 광고한 것이었습니다. 그때야 농부는 자기 농장이 가장 이상적인 농장임을 깨닫고 매물로 내놓았던 것을 취소하고 그 농장을 잘 가꾸면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얘기입니다.
남의 떡이 커 보입니다. 남의 과일이 크고 좋아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천부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한 달란트도 소중합니다. 비록 가진 것 없고 못났다 하더라도 내 아내가, 내남편이, 내 자식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습니다. 나에게만 주어진 은사를 고맙게 생각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소중히 여길 때 그는 성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2. 주신 달란트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주어진 것을 순종함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는 변경시킬 수 없는 상황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어진 것은 받아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키가 165CM 인데 180CM 로 만들려고 애를 써도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여자가 남자가 되겠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전혀 불가능합니다. 지구의 인력을 내 마음대로 할 수도 없습니다. 한번 내뱉은 말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우리의 과거 역사를 변경시킬 수가 없습니다. 나이를 먹지 않으려고 흘러가는 세월을 멈추게 하거나 지연시킬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 할 수 있느냐"(눅12:25)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앞에 닥친 죽음은 받아들어야 합니다.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한계 상황을 받아들일 때에 그 사람은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로부터 무한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모든 동물을 다스리고 모든 과실을 마음대로 먹으며 낙원인 에덴 동산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산 중앙에 있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만은 먹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행복한 환경은 보지 아니하고 "먹지말라"는 그 나무 실과를 따먹으므로써 범죄하고 만 것입니다. 선악과는 피조물과 창조주의 한계선이었습니다. 그것을 뛰어넘으려 하는 인간의 교만한 마음이 인류에게 무서운 타락의 죄악을 가져오게 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한계를 인정하지 못할 때 범죄의 결과가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요즈음에도 보게 됩니다.
유전자 공학자의 말을 들어 보면 인간이 완전히 성장하는 데 20년정도 걸리므로 보통 그 7배수인 140년은 넉넉히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40에 죽고, 또 어떤 사람은 50,60에 죽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순리를 무시하여 교만하게도 그것을 파괴하고 한계를 넘으려는 생각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일생동안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더욱이 그것은 나에게만 주어진 소중한 것으로 알고 잘 활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만일 내가 저 사람과 같은 가정에 태어났지만'.'만일 저 사람과 같은 머리를 가졌다면'.'만일 내가 저 사람과 같은 학교를 나왔다면'하고 '만일에...,만일에...'를 연발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다가는 선한 일도, 생산적인 일도, 창조적인 일도, 의미 있는 일도 하지 못하고 일생 동안을 허송 세월할 뿐만 아니라 불평과 원망을 일삼고 책임을 회피하다가 실패를 거듭할 것이 분명합니다.
3. 주신 달란트를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이 달란트를 활용하지 못하고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며 땅에다 파묻었습니다. 이 사람은 모험심도, 용기도 없었기에 시도도 해보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일생 동안 자기의 달란트를 활용해 보려고 시도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땅에 파묻어 버리고는 잃어버릴까 그 주위를 맴돌다가 일생을 탕진하고 마는 사람들을 우리는 주위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가능성을 활용하려고 시도할 때에 성공의 기회가 우리 앞에 활짝 열려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 목사님이 부흥되지 못하는 2백 교회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 중의 한 교회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왜 이 교회가 부흥되지 못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그 목사님은 "말도 마십시요 우리 교회에서는 헌금이 많이 걷히지 않아 선교비도 없어도. 그리고 교회에 인재다운 인제가 없어도. 그러니 이 교회가 부흥이 되겠습니까?"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슐러 목사님은 "아닙니다. 이 교회는 돈이 없는 게 문제가 아니고 당신에게 아이디어(idea)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당신에게 모험심이 결핍되었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라고 그 목사님에게 충고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어진 달란트를 활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속담에 "말로 배워서 되로 쓰는 사람이 있고, 되로 배워서 말로 쓰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받은 달란트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느냐를 가르치는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미국 일리노이 주에서 정년 퇴직할 때까지 우체부 생활을 하던 프리슬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은퇴할 때 매달 받을 얼마의 연봉과 은혜에 예금해 놓은 1,200달러가 그의 전 재산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은퇴한 우체부는 언제나 선한 마음을 가지고 동네 사람들에게 친절하게도 자기가 알고 있던 꽃을 가꾸는 방법이라는가 새를 키우는 방법 등을 가르쳐 주면서 즐겁게 지냈습니다. 이웃 사람들도 은퇴한 이 우체부를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어느날 프리슬리는 이웃들을 위해 도울 일이 없을까 생각하다 일리노이 주 사람들은 바다와 멀리 떨어져 생활하기 때문에 바다 구경을 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간절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프리슬리는 그들에게 바다 구경을 시켜 주리라 결심하고 바다에 관한 책을 읽으며 사람들에게 설명해 줄 자료를 준비한 후 바다 관광을 할 사람들을 모집했습니다. 수백 명이 몰려왔습니다. 그 사람들을 버스에 싣고 플로리다 주의 마이애미 비치에 데리고 가서 구경을 시켰습니다. 바다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해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관광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다음 번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바다 관광을 가겠다고 신청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돈을 벌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사람들은 프리슬리에게 바다만 구경시켜 줄 것이 아니라 다른 관광 명소도 안내를 해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이제 프리슬리는 폴로리다 주뿐만 아니라 미국 전지역을 커버하는 관광 회사를 설립하고 많은 사람을 위해 봉사하게 되었습니다.
은퇴한 후에 쭈그려 앉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노력한 결과 82살 난 프리슬리는 재산이 7백만 달러나 되는 거부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내 지식과 내 노력을 남에게 나눠주는 삶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물질적인 축복을 허락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달란트, 그것이 비록 적은 것이라 할지라도 충실히 활용하게 될 때에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시며 하나님께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축복을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될 것입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 (마 25: 31-46)
마태복음은 심판의 복음이라는 별명처럼 수많은 심판에 대한 비유 또는 설화가 기록되어 있지만 그 중에서 본 비유는 가장 엄숙하고 또 명백하게 최후의 심판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비유의 형식을 빌린 직설적인 설화로서 자기 자신이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재림하실 때 영광의 보좌에 앉아서 심판을 베푸시되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의인과 악인을 분리하여 영벌과 영생에 들어가게 하신다고 하신다.
이 비유도 하나님 나라를 계시하는데 하나님 나라는 제자들이 현재 상상하고 있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계시하신다. 그들의 천국관은 자기 민족을 짓누르고 있는 여러 가지 불행에서 구원을 받는 현세적이며 지상주의 천국관, 국수주의적이고 민족적인 천국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니고 유대 민족을 뛰어넘어 세계 모든 민족을 그리스도 앞에 모아 선악간에 심판하여 의인들만으로 구성되는 나라임을 보이고 있다. 이때에 이런 계시는 유대인들로서 이해하기 어려웠다.
여기서 의인과 악인의 분리의 기준이 무엇인가?
표면상으로 볼 때는 선행의 보상으로 받는 것 처럼 되어 있으나 이점을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선행의 보상으로 영생에 들어간 것이 아님은 34절에 내 아버지께 복받은 자들이여 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분명하다. 이 말씀은 그들이 받은 축복은 하나님의 거저 베푸신 은총에서 유래한다는 점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그리고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하셨다.
자신들의 선행의 공로로 이 나라를 성취했기 때문에 그들의 공로로 인하여 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으로 받고 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 나라는 우리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창세전에 예비하신 나라이다.
* 이 비유들은 특별히 제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인데 주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해서 영생을 상속하라고 교훈 하신 것이 아니고 제자들이 주님의 오랜 지연 때문에 낙심하지 않고 인내와 소망을 가지고 살도록 주시는 말씀이다.
35절, 카톨릭 - 구원의 원인에 대한 논쟁. 영생이 선행의 공로 때문이라고 주장.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도는 제자들에게 선행을 격려하는데 있다.
이 선행은 영생의 원인이 아니고 결과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의 선행에 대한 보상이 약속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거저 받는 것이다. 그 상은 입양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고 함께 후사가 됨으로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받는 것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상은 당연한 몫이 아니라 값없이 거저 부여된 상이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인간에 대한 사랑보다, 믿음과 간구가 구제보다 더 가치가 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더 잘 드러나 보이는 실례를 들어 보인다.
하나님을 멸시하면서 인간들에게 따스하게 대하는 구제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는 구제와 선행에다 의를 덧붙이는 것이 아니고 거룩하고 의로운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명확히 보인다. 신실한 자들이란 입술로서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자신들의 봉사를 입증해야 한다.
자신들이 짜낸 선행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계명에서 이탈한 자들은 누가 네게 이것을 요구하였나 책망 받는다. 이 귀절을 핑계삼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영적인 일을 도외시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위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의인이기에 나타내는 선행과 구제가 귀하다.
40절 - 주의 백성에게 베푸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자신에게 행한 것으로 여겨주신다. 그들이 무슨 보상을 기대하고 한 것이 아니고 거저 베푼 선행을 주님이 기뻐하신다. 아무리 비천해도 자신의 몸의 일부로 소중하게 보신다.
44절 - 스스로 기만하는 헛된 속임수 - 이자들은 외식하는 그리스도인.
열매없는 무화과의 비유 (눅 13: 6-9)
본문은 열매를 기다리는 주님에게 열매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열매가 열릴 때 까지 기다려 달라는 과원지기 예수의 간구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포도원에 심겨진 무화과 나무의 비유라고 일컬어지는 말씀입니다.포도원은 오늘의 교회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3년동안 정성들인 과원지기 농부는 예수이십니다. 열매없는 무화과는 바로 나의 모습이 아닙니까? 3년동안 회개의 열매를 기대하시다가 무효가 된 과원지기의 애절한 간구가 본문의 중심입니다. 구주 예수는 올해도 주인 하나님께 우리를 위해 애원하고 계십니다.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겠나이다." 주님의 간구를 통해 열매없는 내가 새로운 결단을 이루며 은혜를 나눕시다.
첫째, 하나님은 지금도 성도들에게 좋은 열매를 계속 기대하십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포도원에 무화과를 심었습니다.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덤불이 아니라 의도와 계획에 의해 유실수가 가장 잘 자라는 비옥한 땅 포도원에 심었습니다. 땀흘리고 거름주고 울타리치고 정성을 드렸습니다. 좋은 열매는 당연한 것이고 내 인생의 소유자이신 주인의 기대도 당연합니다. 3년의 성숙기간도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니다. 그런데 결과는 허사였습니다. 이 나무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특별한 은혜로 선택받았습니다. 교회의 옥토에 심겨진 인생입니다. 말씀과 기도의 양분을 충분하게 섭취했습니다. 따라서 복된 열매는 당연한 귀결입니다. 주인은 그 열매를 구하셨습니다. 때도 찼습니다. 조건도 좋았습니다. 환경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포도원의 영양분, 과원지기의 수고와 피, 땅, 결국 땅만 버리게 되었습니다. 찍혀 불에 던져져서 땔감으로 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과원지기는 끝까지 좋은 열매를 기대합니다.
둘째, 찍혔어야 할 나무를 그대로 두라고 애원하십니다.
과원지기는 열매맺지 못하는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셨습니다. 정성을 가꾸어 열매가 가득하게 해보겠다고 결심하셨습니다. 찍지 말라고 애원하셨습니다. 재고의 기회도 없는, 나무주인에게 무익하며, 아무런 이득도 되지 못하고 과원지기의 수고를 무효로 만든 나무였습니다. 완악하고 교만하며 강퍅한 마음들을 다시 파서 사랑과 은혜의 거름을 쏟아부어 마지막 기회를 거두어 보시겠다고 기대하셨습니다. 오늘이 바로 내 인생의 마지막 기회입니다. 돌이켜 회개하며 주인의 뜻에 부응합시다. 주인에게 유익이 되는 열매, 남에게 유익이 되는 열매를 맺기로 결심해야 되는 날입니다. 늦기 전에 정신을 차립시다. 시간이 없습니다. 자리값도 못하고 연료값도 못하고 몸값도 못하는 우리들 영적 이스라엘. 주의 오래 참으시고 덮으시는 사랑이 우리가 변화되도록 기대하고 계십니다.
셋째, 지금 열매가 없어도 희망은 있습니다.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8) 최후의 기회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받기만하고 주지 못하던 인생, 자기 배는 부른데 주인에게 유익이 없는 인생, 겉은 그럴사한데 주인에게 빈것만 내밀던 인생에게도 희망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요한이 그랬습니다. "이 후에 만약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오늘 바로 이 순간부터 새로 허락받은 내 인생을 주께 부탁드려야 합니다. 어제는 지나갔습니다. 새 날에 기회가 다가옵니다. 낙심치 말고 우리를 기대하시는 주의 희망을 나의 희망으로 여기며 삽시다. 온 정성을 다하여 주께 유익이 되고 남에게 유익이 되는 거룩한 무화과 열매를 맺는 성도들이 됩시다. 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이 꽃을 피워 남에게 유익이 되는 거룩한 과일 무화과 열매가 되어봅시다.
탕자의 비유 (눅 15: 11-32)
아버지에 대하여 이 보다 더 잘 이야기한 본문이 있을까?
본문은 일반적으로 탕자의 비유라고 불리워진다.
그러나 실상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버지의 분깃을 가지고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이 아니라 그를 기다리는 아버지이시다. 죄인들을 영접하신 이는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가장 온유하고 마음을 끄는 위대한 신의 현현을, 전인류에게 나타내 주셨다.
그가 죄인들을 영접 하시는 방법은 사랑의 팔을 펴서 전인류를 감싸주시는 방법이다.
그가 죄인들을 비난하지도 않고, 오히려 그를 영접 하시고, 말할 수 없는 하늘의 복을 나누어 주실 때, 사람들은 그를 비난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특별한 보호와 인도로 죄인들을 당신의 은혜의 왕국으로 불러 주신다. 그리스도는 죄인을 친구로 삼으시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얽매어 고통받는 인간들에게 베푸시는 최대, 최고의 선물이다.
본문의 비유는 서로 상관성 있는 비유이다.
세리와 죄인들, 그리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서로 대조되는 그룹이다. 세리와 죄인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마땅히 그들에게 가르침을 베풀어 바른 삶으로 이끌어야 한다. 그들에게는 그만한 능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오히려 세리와 죄인들을 배척하고,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우리가 생각해 본다면, 교회와 세상이 나뉘어져 이원화되는 현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세리와 죄인들의 이원 구도처럼 위험을 내포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할것이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영접하신다. 죄로 번민하는 가련한 인생들을 그리스도는 언제나 영접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사랑으로 다루신다. 죄인들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태도는 그들을 영접하고, 그들과 함께 식탁을 나누는 것이다. 우리 주변의 불신자들은 이같이 사랑을 나누어 줄 대상이며, 관계의 회복을 통하여 하늘나라의 식탁을 함께 할 대상이지 정죄의 대상은 아니다.
11절에서 32절까지의 두 아들의 비유는 1,2절의 등장인물을 반영하는 것이다.
동시에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데 대한 아버지의 기쁨을 보여 주며, 회개하는 자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가르쳐 준다. 본문은 여러가지 진리를 가르쳐 준다.
세상이 인간을 버릴 때 인간도 세상을 버린다.
탕자는 더 이상 먹을 만한 것이 없을 때,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또 허랑방탕한 생활을 한 후에 회개하는 자의 위치는 자유인의 상태가 아니라, 노예의 상태라는 것이다. 그가 노예의 심정의 심정이 되어 돌아온 것에 주목하자. 그러나 그러한 죄인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받는 환영은 비교할 바가 아니다.
아들이 돌아온 데 대한 아버지의 기쁨은, 돌아온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이다. 아들에게 베풀어지는 향연과 춤은 아들에게 있어서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것이다.
본문을 통하여 특별히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훈계가 있다.
본문에 나오는 큰 아들은 불공평한 것 처럼 생각되는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의 조치에 당황하고, 불만을 갖는다. 그러나 그는 일생을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복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내가 여러해 아버지를 섬겼으나, 내게는 염소 한 마리 주시지 않는구나>라고 불평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 하신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것이 다 네것이로되>
탕자의 기쁨은 한시간의 커다란 것이지만, 맏아들은 일생을 통하여 평강을 누렸다. 꾸준한 신앙생활은 황홀경을 체험하지 못하더라도 값진 것이다. 하나님의 잔잔하고 영원한 임재 하심으로부터 오는 평강은 궁극적으로 가장 좋은 것이다.
이제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도 있는 죄의 모습을 보자.
탕자를 통하여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배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비유에서 그 마음이 선천적인 성향을 따르고 있는 한 인물을 보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마음을 본문은 충실하게 묘사해 준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뜻대로 하는 이가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모두 본질적으로 교만하고, 자기 멋대로이다. 자신을 살펴 보면 어떠한가? 이것은 엄청난 위험을 수반한다.
이 아들의 요구에 따라 아버지는 각각 그 살림을 나누어 주었다.[12절]
그러면 큰아들의 재산은 어디에 갔는가?
그는 그 분깃을 즉시 아버지에게로 돌렸다. 그는 지혜롭고 현명한 자이다.
아버지의 재산은 원하였으나, 그의 사랑은 구하지 않은 둘째아들은 그 자비로운 아버지를 말로만 아버지라 불렀고, 그에 대한 존경과 아버지를 중시하는 마음은 없었다. 그는 바로 우리 자신을 반영하는 거울 속의 나와 같은 자이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보다 하나님의 선물에만 더 관심을 가지는가?
죄은 근원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뜻은 아랑곳 없이, 자신의 만족을 채우기에 급급한 사람은 자신의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방종한 삶이 반드시 따르기 마련이다.
죄의 추진력은 굉장하다.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아버지의 곁을 떠나 간 것이다.
이러한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임재는 결코 함께 하시지 않는다.
< 먼나라>는 어리석은 자들이 염원하는 실재하지 않는 상상속의 낙원일 뿐이다.
거기에서 아버지를 떠난 아들은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허비하였다. 죄는 끊임없이 죄의 결과를 가중시킨다. 그는 행복을 얻는 대신에 빈곤에 휩싸이게 되었다. 풍요하고,명예로운 삶 대신에 그는 예속과 수치의 삶을 살아야만 했다. 그는 어디를 가나 이방인이었고,단지 붙여 사는 돼지치기일 뿐이었다.
그의 식물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금수의 먹이는 결코 사람의 배를 만족 시킬 수 없다. 그에게 먹는 기쁨은 사라졌다.
이와같은 말씀은 전체가 신자에게 주는 진리의 말씀이기도 하다.
사람이 하나님 없이 자기 만족의 삶을 추구하여도 결코 만족에 이를 수가 없다. 세상적인 것만으로는 참된 만족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의 본문은 얼마나 많은 것을 이야기 하는가?
인간의 헛된 추구와 그로인한 실패는 물론 인간의 자율성을 허용하시는 하나님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다.
아들의 분깃요구를 거절할 수도 있는 아버지, 그러나 그는 아들의 요구가 결코 갑작스러운 충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재산분배는 아버지의 응징의 방법인 것이다.
본문에는 죄의 성질이 잘 나타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나려는 마음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인간영혼에 엄청난 파멸을 불러 일으킨다.
우리가 하나님께 등을 돌렸을 때, 우리의 영혼이 택한 여정은 길고도 지루하다. 거기에는 기쁨이 없다.
아침 일찍 일어나고, 일하며 밤 늦게야 휴식을 취하며 빵을 먹는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헛수고 일 뿐이다.
죄를 짓는 영혼의 고통은 어떤 것들인가?
그 하나는 결핍[결핍]이다.
죄는 영혼을 굶주리게 한다. 채워질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을 채울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분 밖에는 없다.
친구가 없게 되는 고통이 또 있다. 이 세상의 진정한 친구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다.
또 하나의 고통은 노예생활이다.
죄 아래 있는 모두가 사탄의 노예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고난을 통해서 회개의 마음을 주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다.
우리가 회개에 이르는 마음을 본문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다.
본문의 아들은 죄악에 빠졌던 과거의 삶을 돌이켜 봄으로써 회개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자신의 고난을 통하여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또 자신의 위치를 살펴 봄으로써 회개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에게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여 회개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또 아버지에 대하여 잘못되었고,그릇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를 멀고 어려운 사람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고통을 통하여 아버지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부족함이 없는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의 본문은 무엇 보다도 자비와 긍휼에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에 대하여 가르친다.
본문의 중심은 돌아온 탕자가 아니라, 그 아들을 맞으시는 아버지이시다.
아버지의 긍휼과 자비를 보라. 그는 완전한 복음의 사면장을 우리에게 주신다. 우리는 모두 아버지가 필요하다. 그 아버지는 오늘도 집나간 아들을 기다리신다.
아버지는 집나가 고통받는 아들의 처지를 이미 다 알고 계신다.
아버지는 아들의 실패를 이미 다 알고 계신다.
날마다 문열어 놓고,집나간 아들을 기다리신다.
그러므로 회개를 미루지 말라.
용서를 위한 아버지의 준비를 보라.
그는 제일좋은 옷을 준비하고 계신다.
그는 지환을 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상속자임을 인정하는 지환을 준비하고 계신다.
아버지를 떠난 자는 지금 즉시 돌아가라.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하는자의 계속적인 순종의 큰 가치를 알라.
오늘도 이 말씀을 듣는 성도 여러분이 순종하는 삶을 통하여 아버지와 더불어 사는 행복을 누리기를 바란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눅 16: 1-9)
"(1)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2)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3)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4)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5)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6)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석 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8)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9)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본문은 난해한 비유로 알려진 말씀입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청지기는 매우 교활하고 불의한 사람이며 그의 하는 짓도 악한들이 취하는 태도입니다. 주인으로부터 파면을 통보받고 사후 대책에 부심하다가 아주 기발한 아이디어를 창출하여, 우선 장부를 허위 조작하여 채무자들의 환심을 사는 일에 여력을 쏟게 되는데 그 방법의 재치에 감탄한 주인은 오히려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게 됩니다.
실로 괴악한 이 비유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첫째, 이 청지기는 자신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는 주인의 재산을 맡아 관리하는 관리인인 것과 자신의 능력의 한계와 약점, 그리고 자기가 한 일에 대한 주인의 평가와 거기에 따르는 상벌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 고 말했을 때 그는 조금도 당황하거나 변명하려는 기색없이 당연히 올것이 왔다는 담담한 태도로 앞날을 위한 설계에 몰입합니다.
어떻게 보면 얄밉고 화도 나게 하는 태도이지만 이미 지나간 일에 집착하거나 고심하지 않는 것은 지혜로운 처신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우리들의 한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평가가 필연적임을 명심하고 책임 인간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야만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거나 핑계할 수는 없습니다. "행한대로 갚으리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역사안에서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둘째, 이 청지기는 자기에게 남은 기회와 권한을 최대한으로 활용할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장부를 허위조작하여 빚진 자들의 환심을 산 것이 도덕적으로는 용납될 수 없는 죄악이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그의 태도는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활용하는 지혜를 칭찬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에 기록된 비유중에 달란트의 비유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의 경우 그는 받은 것을 묻어두었다가 그것을 주인에게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받은 달란트를 활용하려고 하는 노력이나 생각이 전혀 없었던 종의 태도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떠하던 받은 것이나 가지고 있는 것은 최대한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은사도 믿음도 능력도 지식도 활용해야 합니다. 활용하지 못할때 한 달란트의 가치는 보존할 수 없음은 물론 소멸되고 말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활용의 결과이며 미문의 앉은뱅이가 걷게된 것도 활용의 결과입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해안에서 폭풍우로 조난을 당한 배가 한 척 있었습니다.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그때 마을사람들은 난파선의 선원들을 구출하려고 어선들을 동원해 수많은 생존자를 구원해 냈습니다. 그러나 워낙 배가 작고 한사람도 더 태울 수 없는 형편이어서 난파선의 틈에 끼어있는 한 선원을 보고도 그대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남아있던 생존자의 구조를 위하여 지원자를 찾는데 마침 한 청년이 그 모험에 지원을 하고 나섰습니다. 그때 청년의 어머니는 한사코 반대를 하였습니다. 그것은 자기 남편도 바다에서 죽은 바가 있을 뿐 아니라 큰아들도 원양어업에 나간지 수년이 되도록 소식을 모르고 있는 형편이어서 이 아들마저 희생이 되면 혼자만 남게 될 것이라고 애원을 하며 지원을 포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는 마지막 생존자 한 사람을 살리려고 구조작업에 나섰습니다. 어머니는 애를 태우면서 아들의 성공을 빌었으며 마침내 아들은 마지막 생존자를 태우고 돌아왔는데 바로 그 생존자는 생사를 모르던 그 어머니의 큰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실로 감동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셋째, 이 청지기는 목적을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지혜와 능력을 총동원하고 있습니다.
빛의 아들을 능가하는 열심과 결단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선을 추구하고 의로운 일을 도모하면서, 악행을 일삼는 자들보다 얼마나 소극적이고 기피적인가에 대하여 깊이 반성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쓰이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풍성한 수확을 쌓아 놓고 내 영혼만을 위한 욕심으로 고마운 이웃 또는 불우한 이웃은 전혀 잊고 있는 어리석은 부자가 아니라 내게 맡기신 주인의 것으로 주인의 기뻐하실 이웃을 위하여 투자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입니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는 말처럼 내가 가지고 있을 때, 내가 쓸수 있을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눅 16: 19-31)
누가복음 16:19-31까지를 가리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라고 말합니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는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비유일 수 있으나 실제적으로 있었던 일의 설명일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나사로의 이름이 나와 있으나 부자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부자의 이름은 '다이브스'라고 합니다. 본문은 다이브스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요약하고 그 삶의 결과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언제나, 어떤 사회나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공존합니다. 미국에도 거지는 있고 일본에도 있습니다. 미국의 뒷골목 빈민굴에 가보면 그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처참하다고 합니다. 사회보장 제도가 만들어지고 지켜지는 나라에도 거지는 존재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부자가 다 나쁜 사람이 아니며, 세상에 있는 거지가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성경 속의 부자 다이브스는 돈이 많은 사람을 대표하기보다는 너무 세상 살기가 좋아 하나님을 마음에 담아 둘 수 없었던 사람을 말합니다.
돈이 많은 게 죄가 아닙니다.
다이브스는 자기가 소유한 재산을 인하여 더 중요한 것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벌을 받은 것입니다.
돈 많이 벌어 축재하는 사람들의 세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값진 옷입니다. 부자로서의 자기 과시를 과거에는 옷으로 나타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자동차, 주택 등으로도 표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날마다 날마다 즐기는 생활입니다. 여가를 기분 좋게 보냅니다. 생의 목표가 그것입니다. 아침에 침상에서 일어나며 궁리하는 것이 오늘은 무엇을 하며 즐길까?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호화로운 생활입니다. 분수 넘치게 사치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를 최대한 활용하여 남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치합니다.
우리나라 부자들 가운데 한국은 겨울에 추우니까 미국 하와이에 가서 지내고 오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고 합니다. 철새처럼 더위와 추위를 피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감히 상상도 안되는 생활입니다. 그러나 부자는 많이 가졌다는 것에 문제가 있지 않습니다. 평생 한 번도 하나님을 생각할 틈도 없이 잘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에 비해 나사로는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가난한 자는 남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입니다. 나사로에게는 부스럼이라는 병이 있었습니다. 못 먹고 병원 가지 못하니 병이 떠날 틈이 없는 것입니다. 질고를 지고 평생을 고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쓰레기통을 뒤지며 사는 불쌍한 인생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사는 존재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사로는 세상의 것으로는 빈 마음을 채울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지긋지긋한 가난 때문에 하나님을 모실 수 있었다면 그것은 거지에게 축복입니다. 가난히 칭찬을 들을 만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난을 싫어하십니다. 그러나 가난 때문에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면 그것은 축복이라는 사실입니다.
가난은 소유한 재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 설명되지 않습니다.
마음에도 부자가 있고 가난한 자가 있습니다. 나사로는 몸과 마음이 함께 가난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일생을 통해 하나님을 찾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22절에 갑자기 그에게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부자보다 나사로가 먼저 죽었습니다.
가난한 자는 빨리 죽습니다. 부자는 젊어서 몸을 녹용, 뱀, 인삼 등으로 많이 보호했기 때문에 숨이 안 끊어져 고생을 합니다.
나사로는 죽었으나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가마니에 둘둘 말아다 어딘가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다 버렸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호화로운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사람은 다같이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이 운명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70 이후에는 너무 그렇게 살려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늙어 눈치보며 오래 살면 또 무엇하겠습니까? 남에게 피해주며 오래 살 필요가 없습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이므로 성실하게 그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세 가지 죽음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단절된 영적인 죽음입니다.
둘째는 육신적 죽음입니다.
세째는 영원한 죽음입니다.
육신의 죽음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잘 압니다. 그러나 자신이 죄와 허물로 죽은 존재요 영원한 죽음 지옥에 가게 될 운명을 아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육신이 죽으면 심판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을 무시한 사람들입니다.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영원한 천국에 가게 됩니다.
죽은 존재는 잊혀진 존재입니다. 그들은 미래에 대하여 관심이 없습니다.
사람이 죽은 뒤의 운명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죽기 이전의 상태와 죽음 이후의 일을 예수님은 가장 잘 아십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만 18회에 걸쳐 지옥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지옥이라는 말을 유치하게 생각합니다. 지옥을 말하는 사람은 무식한 사람으로 취급됩니다. 불신자들은 지옥에 대하여 모르니까 모르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자기 위안을 삼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자비로운 입에서 지옥이라는 말이 열 여덟 번이나 나왔다는 사실에 주의 하여야 합니다. 이것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핵심을 피해서도 안됩니다.
육신이 죽으면 두 길이 나타납니다.
간단 명료하게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 그 사실을 설명해 줍니다.
23절에 음부 지옥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지옥은 참혹한 곳이기에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곳에 가지 말도록 이웃과 어린 자녀와 그를 중심으로 해서 일어나는 사건을 동원해서 막으십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 나사로를 보았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나 그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영원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지옥은 바로 그런 곳입니다.
지옥이 어떤 곳입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다섯 가지로 나타납니다.
① 지옥은 무서운 고통을 당하는 곳입니다.
불꽃 가운데서 사정없이 고통받는 곳입니다. 도스트예프스키가 쓴 '카라마쵸프의 형제들'이라는 책에서 보면 이렇게 지옥을 설명했습니다.
'만일 지옥에서 붙는 불이 물질에 붙는 불이라면 견디기 쉬울 것이다. 이 몸이 타는 불이라면 견디기 쉬울 것이다. 지옥의 불은 육체가 타는 곳이 아니라 우리 영혼이 알지 못하는 불에 타는 곳이라서 그것이 육신이 타는 것과는 비교가 안되는 아픔과 괴로움을 당하게 된다.' 하나님은 인생을 제맘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지옥을 예비하셨습니다.
② 지옥은 기도가 통하지 않는 곳입니다.
물 한 방울의 자비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이 땅에서는 불신자에게도 비를 주시고 땅의 열매를 주시지만 그곳에서는 아무리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습니다.
③ 지옥은 천국을 보면서도 접근하지 못하는 곳입니다.
사람에게 비교의 고통이란 견디기 어려운 것입니다. 차라리 안 보이면 모르겠는데 눈 앞에 밝히 천국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더욱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가난은 그 자체로도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남과 비교할 때 더욱 큰 괴로움입니다.
④ 지옥은 무섭게 기억력이 되살아나는 곳입니다.
무디라는 미국의 의학자는 어떤 사고를 인하여 죽음 직전까지 갔던 사람이나, 죽었다 살아난 사람들을 찾아 인터뷰를 한 내용을 '죽음 이후'라는 책으로 엮었습니다. 그 책에서 죽음 이후의 경험자들은 자신들의 체험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죽은 뒤에 좁고 긴 터널을 통과하게 되었다. 내가 살면서 경험했던 모든 일들이 기억되었고 이 세상의 모든 비밀들을 다 알게 되었다"
부자는 이 땅에 살고 있는 다섯 형제를 분명하게 기억했습니다.
세익스피어는 그의 작품 '리챠드 3세'라는 책에서 지옥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불신자들은 양심에 달린 수 십, 수 백 개의 혓바닥들이 쉬지않고 지껄이는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지옥은 자신이 지은 모든 죄악들이 기억나게 되는 곳입니다.
⑤ 지옥은 소망이 없는 곳입니다.
단테가 쓴 '신곡'이라는 책을 보면 지옥 어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고 했습니다. "이 곳을 들어가는 자는 희망을 버릴지어다"
예수님께서 지옥을 말씀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너무 자기 운명을 모르며 사는 사람들, 어리석은 사람들, 헛된 것에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 자기 것이 아닌 것에 집착하는 사람들, 세상 낙에 빠진 사람들, 나중에 다 놓고 갈 수밖에 없는 것에 눈이 먼 사람들, 여기 본문 속에 부자 같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게 하기 위하여 이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세상 낙에 빠져 있는 사람들아 정신 차려라. 하나님을 탓하지 말라" 하십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왜 지옥을 만들어 인간을 괴롭히는가? 정신적인 고통을 주는가?" 지옥은 사람들을 위하여 만든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마귀를 가두기 위하여 만든 곳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마귀에게 속아 지옥에 가게 된 것입니다.
왜 부모가 자녀 교육을 할 때 때리는 것을 염두에 두고 회초리를 예비시켜 놓고 교육합니까? 의로우신 하나님은 죄를 적당히 넘기실 수 없습니다. 죄를 공의롭게 처리하십니다. 응분의 댓가를 치루게 하시는데 그것이 죽음 곧 영원한 죽음, 지옥입니다.
하나님은 지옥을 마련하고 계획하셨지만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만큼 사람들을 지옥에 가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분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수 천 년 동안 노력하셨는지 모른다. 세상에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래도 돌이키지 않자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 지옥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돌려놓기 위하여 희생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지옥의 고통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내가 지옥에 가면 당할 고통입니다. 지옥의 고통을 그가 십자가에서 친히 다 담당하게 하시고 예수님을 살리신 다음 예수님을 지옥으로 가는 길목에 세우시고 가지 못하도록 막으십니다. "이곳으로 가면 영원히 희망이 없다" 얼마나 힘을 다해 막으시는지 모릅니다.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들의 고통은 필설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지옥으로 빠져가는 자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마 18:8-9)"
지옥의 고통의 길을 피하도록 하나님은 천국을 준비하셨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행복이 무엇입니까?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하나님이 준비한 나라의 행복과 기쁨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이 자리에 들어오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불신자를 부르셨습니다.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돈을 바쳐라, 생명을 바쳐라, 자식을 바쳐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안내자 역할을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 운명을 예수님께서 대신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옥가는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신 자격자이십니다. 지금도 주님은 외치십니다. "부자야! 가난한 자야! 왜 계속 그리로만 가는가. 나 예수를 믿으라!" 하십니다. 그런데 왜 이 요구를 거절하십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세상의 지식, 돈, 건강과는 상관없이 사람은 반드시 죽습니다.
이 지구상의 13억 인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그들이 믿는 성경책이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매년 6억권 이상이 팔리는 책이 성경입니다.
죽는 것은 어길 수 없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두 길 중에 한 길은 분명히 가서는 안될 길입니다. 지옥을 피하는 길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내일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죽음과 생명의 갈림길에 놓인 우리 운명입니다. 지금이 바로 기회입니다. 죽음이 따라올 때 그 때는 기회가 없습니다. 가서는 안될 길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왜 이웃을 하나님이 내게 보냈을까요? 왜 전화를 하고 전도지를 나눠주고 괴롭히는 것일까요? 가는 길이 너무나 가서는 안될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주일학교 어린이를 통해서, 이웃을 동원해서, 사건들을 동원해서 막으십니다.
강원도에 황지라는 곳이 있습니다. 탄공촌이 있는 곳입니다. 탄광촌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를 가리켜 막장인생이라고 합니다. 막바지 인생입니다.
미국에 이민 간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직업이 택시운전이라고 합니다. 택시 운전 중에 생명을 잃는 사람들이 비일비재한데 직업이 없으니까 마지막으로 목숨걸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막장 인생들은 수천 미터 지하에 들어가 40℃가 넘는 곳에서 하루 8시간을 일합니다. 탄가루를 뒤집어 쓰고 그 안에서 먹고 일하면 탄가루가 폐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러면 폐가 굳어지는데 그 병이 구폐증입니다.
나중에는 폐인으로 병상에서 쓸쓸하게 죽어가게 됩니다. 구폐증은 아무리 현대 의술이 발달했어도 치료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막장인생으로 어렵게 살아기지만 아이들에게만은 그 직업을 물려주지 않으려 합니다.
어느 광부의 아들이 쓴 시(詩)가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탄을 캐신다.
나는 공부를 못 하니까 나도 커서 광부가 되겠지.
그런데 아버지는 절대 광부가 되지 말라 하신다.
거지가 되었으면 되었지 광부는 절대로 되지 말라 하신다.
왜 아버지가 한사코 말린 것일까요? 광부의 생활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한사코 지옥에 가지 말라고 하실까요? 하나님은 너무나 지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돈 가지고 오라는 것 아닙니다. 지옥에는 제발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상징적인 장소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죽어서 실제적으로 가는 곳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습니다. 우리가 힘써 전도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 것을 다 잃고도 선택해야 할 것이 천국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해야 할 곳이 지옥입니다. 그 길과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천국이 있습니다. 영생이 있습니다. 사람의 풍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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