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라~헬라파 유대인들

 

헬라:Greece(지명)

 

( JEllav", Greece)

 

성경에는 `헬라'이지만 일반적으로 `희랍'(希臘) 또는 `그리이스'라고 한다. 헬라의 역사와 문화는 고전 헬라와 헬레니즘의 두 시기로 대별되며, 양자를 가르는 원동력은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과 그 역사적 영향이다.

 

 

 

 

 

 

고전 헬라

 

 

 

1. 헬라의 풍토: 헬라인이 최초로 역사를 이룬 무대는 발칸 반도의 남단 지역과 에게해를 건너 대안의 소아시아 서안 지방과 그 사이에 산재해 있는 에게해 제도를 포함한범위이다. 총 면적은 13.2㎢, 인구 889만(1970년)의 나라인데, 신화로 유명한 올림푸스 산을 비롯하여 각지에 산악이 기복하고 평야는 적어 곡물이 부족하여 해외로부터의수입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와 같은 사정은 에게해 제도는 물론, 다소 평지가있는 소아시아 서안에서도 큰 차이는 없었다. 우량은 적고, 고온한 아건조 지대에 속하여 포도, 감람 등의 과수 재배에 적당하고, 포도주와 감람유는 헬라인의 생활 필수품이었을 뿐만 아니라 해외로 수출하였다. 목축으로는 양과 산양의 사육이 행해졌다.이와 같은 풍토가 곧 많은 폴리스 국가(polis, 도시국가)를 성립시키고, 시민의 야외에서의 공사(公私)의 생활민회(民會), 극장, 나체경기를 왕성하게 하는 한 요인으로되었다.헬라헬라

 

 

 

2. 동지중해 세계의 헬라: 이 풍토에 문화의 서광을 비추이게 한 것은 소아시아계와 지중해계 혼성 민족인 그레데인이다. 그레데는 BC 2000년 경 청동기 문명의 최성기에 접어들어 상형 문자나 AB 2종의 선문자(線文字)를 새긴 점토판 문서가 출토되고 있으며, 그 중 선문자의 B는 1953년 영국의 벤트리스(M. Ventris, 1922-1956)가 해독하였다. 그레데는 수도 그노수스(Cnossus)를 비롯하여 각지에서 발견된 궁전의 유적 등에서강력한 왕의 지배와 동지중해의 제해권의 독점을 추정할 수 있다. 그 문화는 오리엔트제지역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장식 벽화나 다채도기(多彩陶器)의 섬세 화려하고 사실성과 유동감에 뛰어난 표현과 같은 해양적 풍토에 맞는 미술을 낳았다.그레데가 BC 1400년 경 지진 또는 헬라인의 내습에 의해 파괴된 후 문화의 중심은 헬라 본토 남부로 옮겨지고, 미케네(Mycenae)나 필로스(Pylos)에서는 그레데의 것과 같은 도기가 수리아, 팔레스틴에서 출토하고 있는 것으로부터도 동지중해 세계의 유기적일체성이 주장되고, 구약성경과 호머로스((Homer)의 서사시가 공통적인 기반에서 성립되었다는 가설이 우가릿(Ugarit)의 서사시 등을 실마리로 유력시되게 되었다. 동시에미케네, 티린스(Tiryns) 따위의 거석으로 방비한 성벽이나 문, 거성의 중심에 난로를설치한 큰 홀 등은 그레데의 개방적 궁전과는 다른 북방적 요소를 나타내고 있는데,출토 문서로 알 수 있는 당시의 제왕국들은 관료와 서기를 구비하고 수다한 동네를 지배하고, 백성에게 공납과 부역을 부과한 소형의 오리엔트적 전제 군주국이었다고 추정된다. 이 미케네형의 사회, 문화의 담당자는 동방 방언군(方言群)에 속하는 아가야족의 헬라인인데, 그레데 문화를 정복 파괴하면서 섭취했고, 또 에게해와 동지중해 지역과 교역을 크게 하였으나, 그 세력도 BC 1100년 경에는 쇠퇴하였다. 이것은 BC 2000년말에 새로 전래한 서방 방언군에 속하는 토리아족 헬라인의 남하 침입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3. 폴리스 이전의 헬라 사회: 헬라인은 인도˙유럽어 족에 속하고, 그 중 동방 방언군의 아가야족과 이오니아족은 BC 2000년대의 초엽 경, 발칸 반도를 남하하여 헬라에 이르고, 아가야족은 북부와 남부에, 이오니아족은 중부에 각각 정주하고, 상기 미케네 문화를 이루어 BC 1200년 경 힛타이트 왕국이나 트로이)의 멸망으로 소아시아 서안으로 진출하여 곧 도리아족도 이에 따라 제각기의 식민지를 이룩하였다.서방 방언군의 헬라인의 남하에 의한 미케네 문화의 쇠퇴는 반드시 암흑 시대를 초래하지는 않았다. 헬라는 철기 시대에 들어가 물질적 생산력, 특히 무기의 생산에는 눈부신 발전을 하였다. 미케네 사회의 강력한왕권의 모습은 사라지고 많은 소공동체 국가로 분열하였다. 귀족이 우위를 차지하는이들 공동체에 있어서 분깃 땅의 등대는 인정하기 어려우나, 아직 자유로운 소토지 소유 농민의 씨족제적 결합은 지장을 받지 않고 사회 구성의 기반으로서 존속하고 있었던 것은, 오리엔트 사회와의 대비에서 헬라 사회와 문화 형성의전제 조건으로서 주목된다. 또, 종교˙사법면에서 씨족의 공동 제사나 `피의 복수' 따위의 공동체적 규제는 여전히 존재했다고 보인다.

 

 

 

 

4. 폴리스의 성립: 곧 BC 9-8세기 경부터 고전 헬라의 가장 기본적인 정치˙사회 구조인 폴리스가 발생하였다. 폴리스의 성립은 촌락적 정주와 씨족제 사회를 지양하고, 혈연적 공동체로부터 지연적(地緣的) 사회에로의 전진을 뜻했지만, 그것은 폴리스 이전의 사회에서 귀족의 지배가 확립되거나 새로 전래한 서방 방언군의 헬라인이 선주민을정복하고 자배계급으로 됨으로서 실현되었다. 전자의 경우는 아덴을 전형으로 귀족의중심 도시로의 집중은 영웅 테세우스(Theseus)의 업적으로 돌리고 있으며, 후자의 경우는 아가야족 선주민을 정복한 도리아족의 스파르타(Sparta)가 범례이고, 귀족의 지배는 행해지지 않았고, 원시 공동체의 전통이 강하게 보존되어 있으나, 생산적 노동을하지 않고 정치와 군사에 전심할 수 있는 계급의 성립을 전제하고 있는 점은 동일하다. 폴리스는 중심 도시와 주위의 전원으로 되고 있으며, 중심 도시에는 폴리스의 수호신을 모신 조금 높은 언덕 아크로폴리스(ajkrovpoli")가 있었다. 폴리스는 자유, 자치를 이상으로 하고 시민의 공사 생활은 이 공동체 안에 완전히 포섭되고 있었다. 이 시대에 왕권은 귀족에 구축되어 몰락했다. 다만 그 경과는 대체적으로 완만하여 스파르타처럼 정치적으로 무력한 두 왕가가 존속한 경우도 있고, 아덴처럼 종교적관직으로서 흔적을 남기고 있는 일도 있다. 폴리스 사회에로 이행하지 않은 지역에서는 원시적 왕정이 존속했다. 왕정에 대신하여 귀족의 지배가 문벌과 지연, 그리고 부(토지, 가축)에 입각한 `기사(騎士)'(iJppei'")로서의 군사적 기능에 의해 확립되고, 신들의 자손으로서의 신인(神人), 즉 영웅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계보의 작성이나문장(紋章)을 사용하게 되었다.
 
5. 영웅 시대의 문화: 이와 같은 `영웅 시대'에는 도리아족 침입 이래의 문화 파괴와 정체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헬라의 문화적 창조력이 움트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미케네 문자와 단절하고 새로 베니게인으로부터 알파벳을 배워 모음을 고안, 헬라문자를 만들고, 또 민족 공통의 체험을 노래한 서사시를 낳게 하였다. 현존하는 것으로는 호메로스(Homeros)의 작이라고 하는 `일리아스'( JIliav") `오딧세이아'( JOdusseiva) 헤시오도스(Hesiodos)의 작 `신통기'(神統記,Qeogoniva) `일과 날'( JErga kai; JHmevrai)이다. `일리아스', `오딧세이아'의2대 서사시는 민족의 전승에 의거했다고는 하지만, 이미 비할 데 없이 문장이 잘 다듬어져 있고, 통일 있는 현존의 형식을 갖춘 것은 한 사람의 개성-호메로스-에 의해 된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거기에는 전쟁과 표백(漂泊)을 통하여 인간이 신들과 친교하여 운명의 기반에 굽히지 않고 분연히 전진하는 영웅들의 세계가 생생히 묘사되어있다. 이들의 서사시는 미케네 시대를 주제로 하고 있지만, 이 시대의 사회나 정치 상태도 반영하고 있다.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이미 BC 6-5세기 이후의 헬라에서 고전의 지위를 점하고, 청소년 교양의 소재로 되었다. 이에 대하여 헤시오도스는 `일과 날'에서 노동하는 한 작은자작 농부의 애환을 노래하고, 근로의 존엄성을 역설했으며, `신통기'에서 헬라 신들의 계보를 조직하고 철학적 우주론의 선구를 이루었다. 이리하여 쓰스를 주신(主神)으로 하고 부권적, 헬라적 신족(神族)이 에게해 세계의 모권제 사회에서의 여신들을 포섭한 올림포스 신들이 성립, 12 남녀의 주요 신을 비롯하여 각기의 신이 일정한 직분과 기능을 가지고 자연계와 인간계의 제사상(諸事象)을 주장하고, 미케네 시대의 정령(精靈), 사자(死者) 숭배에 대신하여 민족 종교로서 보급하였다. 또, 신들의 의인화는신상(神像)의 조각과 신전을 건립하고, 이에 봉사하는 신관(神官)이 임명되고, 오리엔트 사회와 같은 특권 신분을 구성하지 않고, 시민은 교대로 취임할 수 있으며, 또한일정한 교리에 따라 사람들의 신앙을 규정하는 경전도 없었기 때문에 자유로이 신들을해석하는 것이 허용되고 예술성이 풍부한 신화가 형성되었다. 또, 쓰스의 행사로서 지방적인 것으로부터 전 헬라적 제전으로 된 올림피아의 경기를 비롯하여 피디아(Pythia), 이스드미아(Isthmia), 네메아(Nemea)의 경기도 많이 하여 각 폴리스의 대표자가체육 경기나 문예의 콩쿠르(concours)를 다투어 헬라 문화의 진보와 민족 정신의 결성에 기여했다.
 
6. 식민 활동의 전개: 곧 헬라인은 BC 8-6세기 사이에 지중해와 흑해 연안에 대규모적인 식민활동을 하여 식민시를 건설했다. 식민시 중에는 비잔틴(Byzantion), 네아폴리스(Neapolis), 맛살리아(Massalia)와 같이, 오늘날 각각 이스탄불, 나폴리, 마르세이유로서 번영을 계속하는 도시도 있다. 식민의 원인은 토지가 없는 시민의 소유지 취득이라는 농업적 의미가 주되는 것이었으나, 상업적 활동도 이에 수반하고, 또 전쟁에패한 시민의 새 폴리스 건설이라는 정치적인 동기의 경우도 있었다.식민시는 모시(母市)에서 제사 의식, 법률, 관습 등을 계승하였다. 그리고 로마나 근대 국가의 식민지와는 달리 정치적으로는 완전한 독립이었다. 이와 같이 헬라인이 세계에 식민하고, 도처에서 원주민과 접촉한 결과 헬라어를 말하지 않는 이민족을 바르바로이(Bavrbaroi)라 부르고, 스스로는 종족과 폴리스의 구별을 초월하여 언어, 종교 등의 공통의식에 기초하여 `헬레네스'( {Ellhne")라 칭하였다. 델포이(Delphoi)나 델로스(Delos) 섬의 아폴론(Apollon)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 동맹(암픽투오니아,ajmfiktuoniva, Amphictyony)이나, 상기 호메로스 시편, 올림피아 경기 등도 민족 의식의 강화에 한몫하였다.
 
7. 평민의 대두: 헬라 세계의 확대와 BC 7세기초 루디아(Lydia) 또는 이오니아(Ionia)에서 발명된 주조 화폐의 보급은 원격지 상업과 수공업의 발달을 촉진, 노동력 부족으로본도(Pontus), 시실리(Sicilia) 등 식민지 주변 세계에서 이민족의 구매 노예를 많이수립했다. 화폐경제의 또한 시민(평민)의 계층 분화를 추진하고, 채무 때문에 자유민에서 노예로 전락하는 자가 생기는 반면, 농업 생산물의 판매나 상업˙수공업에 의해부를 획득했다. 또, 수공업 생산의 발달에 의해 무구(武具)를 값싸게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중소 토기 소유 시민의 중장비 보병부대가 귀족의 전사(戰士)를 대신하여 국방의 주력으로 되었다. 이와 같이 경제˙군사로 진출한 평민은 귀족의 전제에 대하여 성문법 제정이나 참정권을 요구하였다.BC 6세기 경 아테네 도기예를 들면, BC 6세기 초의 솔론(Solon, BC 640년 경-560년경)의 재상 정치에서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 ?-BC 528)의 참주정치(僭主政治)를 거쳐 동 세기 말 크레이스테네스의 민주정치로까지 발전한 아덴은 그 좋은 예이다. 이에 대하여 스파르타(Sparta)에서는 원래 정복자인 도리아족의 스파르타인이 많은 아카이아족 피정복민의 현물 공납으로 생활한데서부터 자위의 필요상 군대 조직에의한 극단적인 국가주의적 교육을 실시하여, 시민에는 상공업이 완전히 금지되어 쇄국정치를 행하였지만, 일정한 토지 소유자인 중무장 시민단(市民團)의 지배였던 것은 이시기의 아덴과 대차가 없었다.
 
8. 과도기의 문화: 이와 같은 민권의 신장에 의해 이 시대에는 민중에의 문화의 보급,개인 의식의 해방에 현저한 특색을 보이고 있다. 문학에서는 개성의 발로인 서정시가발생하고, 여류시인 삽포(Sappho, BC 612년 경-?)가 격렬한 정열 속에 감미로운 가락을 노래한 외에 아르킬로코스(Archilochos), 밈네르모스(Mimnermos, BC 600년 경),데오그니스(Theognis, BC 544-501), 아나크레온(Anacreon, BC 570-?) 등의 시인이배출했다.조형 미술에서는 오리엔트와의 교통으로 그 영향을 받으면서도 고풍양식(古風樣式)으로 들어가 민족적 특성을 발취하기 시작, 신전 건축에는 장중한 도리스식(Doris)과 우아한 이오니아식(Ionia)이 생기고, 조각에는 아덴의 아크로폴리스(ajkrovpoli", Acropolis) 출토의 `고풍의 미소'(archaic smile)를 포함한 일군의 처녀상과 같은걸작이 나타나 묵화, 도자기에 그린 그림에 작가명이 있는 것도 개성을 존중하는 헬라의 특색을 보이고 있다.또, 과도기의 정치˙사회적 변혁은 세계관의 영역에도 영향을 미치고, 종래의 올림포스의 신화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은 서로 대립하는 두 방향으로 작용하였다. 하나는 종교의 심화이고, 외면적인 경신을 내면적, 신비적 경건으로 발전시켰다. 본래 비(非)올림포스적인 디오니소스(Dionysos) 종교의 열광적인 전파, 그것이 순화된 오르페우스교(orphism), 앗티카의 엘레우시스(Eleusis)의 밀의(密儀) 등이 이것이며, 현세적, 귀족적인 올림포스 신들의 예배에 대하여 피안적, 평민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델포이의신화가 인심을 지배하게 된 것도 이 시대이다. 이에 대하여 전통에 속박되지 않고, 상업과 항해가 왕성하였던 동방 이오니아에서는 자연철학이 일어나 물질의 실체(Fuvso") 또는 시원(始原,ajrchv)을 알아보고, 자연 현상을 법칙에 지배되는 것으로하였다. 달레스(Thales, BC 624년 경-546년 경)에 비롯되는 밀레도 학파, 올림포스의의인적(擬人的), 비윤리적인 신전을 통박한 크세노파네스(Xenophanes, BC 570년 경-460년 경) 외에 오르페우스교에 유사한 종단(宗團)을 경영한 피타고라스(Pythagoras,BC 6세기 후반 사람)가 음악과 수학을 중시하여 우주의 조화와 수(數)의 신비를 역설, 종교와 철학의 두 조류를 융합하려고 한 것이 주목된다.
 
9. 폴리스 사회의 완성: 이와 같은 헬라 세계의 발전에 대하여 곧 커다란 외압(外壓)에의한 민족적 시련이 왔다. 헬라인의 식민 활동은 BC 6세기 반 경부터 국제 정세에 의해 비로소 곤란해졌다. 서지중해 방면에서는 카르타고인과 에트루리아인에 의해 진출이 저지되었으나, 동지중해 세계의 형세는 가일층 위급하게 되었다. 바사의 전(全) 오리엔트 세계 통일에 의해 소아시아의 헬라 식민지는 정치적 자유를 잃고 경제적 압박을 받았다. BC 500년 밀레도를 중심으로 하는 이오니아의 헬라인의 반항은 실패로 끝나고, 바사 왕 다리오 ?세는 이오니아인을 지원한 아덴을 치기 위해 군을 파견했으나, 아덴은 독력으로 바사를 마라돈(Marathon) 전투에서 격퇴하였다(BC 490).다리오의 아들 크세르크세스(Xerxes)는 전 헬라를 정복하기 위하여 손수 대군을 거느리고 육해로부터 침입했을때, 이에 굴복 또는 중립을 지키는 폴리스도 있고, 데르모필래(Thermophylai)의 험조(險阻)도 돌파 당하고, 아덴도 공략되었으나, 아덴의 데미스토클레스가 거느린 군사가 바사 해군을 살라민스(Salamis)만 싸움에서 격멸(BC 480)하고, 이듬해 육전(陸戰)에서도 헬라 연합군은 플라타야이(Plataiai)에 승리를 거두어바사의 야망을 꺾었다. 같은 무렵, 시실리의 헬라인도 히메라(Himera)의 싸움에서 카르타고를 격파하고(BC 480), 쿠메(Cumae) 해전에서 에트루리아인을 이기어(BC 474) 동서에서 모두 헬라 세계의 방위에 성공하였다.대 바사 전쟁에서 헬라의 승리는 오리엔트의 전제 정치에 대한 헬라 시민단의 자유 독립의 승리를 의미하며, 이 전승에서 가장 공적이 있던 아덴의 흥륭(興隆)은 눈부시어델로스(Delos) 동맹을 결성하여 그 맹주로 되고, 바사의 재침입에 대비하였고, 마침내이오니아의 독립을 바사로 하여금 승인시켰다(BC 448). 그러나 동시에, 소위 아덴 제국(帝國)을 형성하여 그 법률 제도를 동맹 제시(諸市)에 강요하고, 동맹 자금의 금고도 델로스에서 아덴으로 옮겨서 마음대로 유용하였다. 그것에 의해 살라마스 해전에수병으로 정군했던 무산 시민의 정치 참여가 재종적으로 가능하게 되고, 페리클레스(Perikles, BC 500?-429)의 지도하에 철저한 민주정치가 행해져, 시민은 특별직을 제외하고는 누구든 공무원으로 취임할 수 있게 되고, 더구나 국정의 최종 결정권을 가지는 것은 전 시민의 총인민회(民會, 에클레시아,ejkklhsiva   )이며, 패리클레스시대의 아덴은 고대 민주정치의 완성기였다. 그러나 민주정치도 폴리스의 노예제사회의 테두리 안에서 실현된 것으로서, 참정원은 시민의 성년 남녀에게 한하고, 부인이나재류외인(在留外人)에게는 부여되지 않고, 수공업의 작업장이나 은광산 등에서 노동하고, 공공이나 가내의 잡역에 종사한 노예에게는 여전히 인격이 인정되지 않았다.
 
10. 아덴 전성기의 문화: 바사 전쟁 후의 헬라 세계에서 아덴의 지도적 지위는 문화의 제영역에 있어서도 완성기 폴리스의 자유활달한 창조력을 결집시켜 아덴을 헬라적 교양(paideiva)의 학교로서 오래 서양문화의 규범으로 되는 고전문화를 형성시켰다. 문학에서는 시모니데스(Simonides, BC 556-468)가 바사 전쟁의 수많은 기념 명시로명성을 떨치고, 핀다로스(Pindaros, BC 520년-경 441)는 올림피아 따위의 경기 우승자에게 바치는 장중한 송시로 걸출하여 서정시의 말미(末尾)를 장식했으나, 아덴 전성기에는 연극이 이에 대신하였다. 비극, 희극은 공히 디오니소스의 제사에서 유래하나, 전자에는 웅대한 아이스큘로스(Aischylos, BC 525-456), 경건한 소포클레스(Sophocles, BC 496-406), 이지적인 유리피데스(Euripides, BC 480-406)가 연달아 나타났고, 후자에는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 BC 448 경-380)만이 작품이 현존하고,당시의 정치˙풍속˙저명인을 통렬히 풍자하고, 부인 문제나 반전 평화론에도 관심을보였으나, 시대는 이미 BC 4세기에 미치고 있다. 이 극들은 국가적 제전의 행사로서시민에 극작가의 콩쿠르의 형식으로 무료 공개되어 시민 중에서 심판이 뽑혀 상을 정한 것은 정말 민주정기(政期) 폴리스에 어울리는 것이었다.이 시기에 역사학의 발생을 보고, 소아시아의 할리카르낫소스(Halicarnassos) 출신의헤로도토스(Herodotos, BC 483 경-425), 아덴의 투키디데스(Thucydides, BC 471 401)의 2대 역사가가 나와 전자는 바사 전쟁, 후자는 페로포네소스 전쟁의 역사를 기록했다. 또, 자연과학에서는 힙포크라테스(Hippocrates, BC 460 경 377)가 과학적 의학을 수립했다. 전대의 소산이었던 자연철학도 계속 행해져 `만물은 흐른다'고 했고, 변전의 속 깊이에 `영원히 사는 불'이 있다고 역설한 에베소의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 BC 644-?)에 대하여 우주의 근본 실재를 유일 불변한 `있는 것(有)'으로 하고, 그것을 `아름답고 매끈한 구(球)'에 비유한 파르메니데스(BC 540-470)가 나타났고, 그 후 화풍지수(火風地水)의 4원소와 그것을 움직이는 힘으로서의 사랑과 증오를 말한 엠페도클레스(Empedocles, BC 495-435), 성질이 다른 무수한 종자가 사유(思惟)에의해 움직여진다고 한 아낙사고라스(Anaxagoras, BC 500 경-428)가 나왔으나, 데모크리토스(Democritos, BC 460-370)가 그의 스승 레우킵포폐스(Leucippos, BC 440 경)의설을 받아 만물의 근원을 `원자'(a[toma)로 하고, 무수한 원자가 여러 가지 순서와 자세를 취하여 서로 결합, 또는 분리하여 만물이 생성되고, 인간의 영혼도 가장 미세한 원자라고 하는 고대 원자론을 대성하기에 이르러 자연철학의 논의는 모두 나온느낌마저 있었다.바사 전쟁 후의 아덴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정치 시기의 폴리스 사회에 있어서는 청소년이 입신 출세의 수단으로 되는 시민으로서의 기능을 체득하는 것이 요망되어, 이에따라 변론술이나 수사학의 교수를 업으로 하는 소피스트(sofistaiv)가 출현,프로타고라스(Protagoras, BC 484-411)나 고르기아스(Gorgias, BC 483 경-375 경)가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들은 인식의 주관성을 말하여 자연과 인위를 대치(對置)하고, 후자의 소산인 도덕율이나 국법은 상대적 가치 밖에 없다고 했고, 전통적으로 대하는 비판적인 연설로서 청년들을 흡수하였다. 이와 같은 폴리스를 일탈(逸脫)하는 풍조에 대하여 소크라테스(Socrates, BC 469 경-399)는 시종 아덴 시민으로서 사고하고행동하여 시민의 도덕 향상에 정력을 기울였지만, 페로포네소스 전쟁 후의 아덴의 우민 정치적 경향에 비판적이었던 것 등 때문에 BC 399년 전통적 종교와는 다른 가르침을 가르쳐 청소년을 그르친 죄로 기소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이 불법적인 판결에 순복하여 종용히 독배를 마셨다.미술은 이 시기에 고전적 양식을 완성했다. 그 대표적인 유구(遺構)는 아덴의 아크로폴리스 구릉 위의 파르테논(Parthenon)인데, 건축가 익티노스(Ictinos), 칼리크라테스(Callicates), 조각가 페이디아스(Pheidias)가 중심이 되고, 시민의 총력을 결집하여된 것인데, 도리아식 열주의 조화와 균형은 이 신전을 장식한 조각과 더불어 대리석에응결된 헬라 정신이라고 높이 평가되고 있다. 조각가에는 이 밖에 미론(Myron), 폴리클레이토스(Polykleitos)가 걸출했다.
 
11. 폴리스 사회의 쇠퇴: 아덴의 번영도 영속하지는 못하였다. 전에 아덴과 번영을 시기하고 있던 스파르타와의 사이에 BC 431년 페로포네소스 전쟁이 일어나, 데로스 동맹을거느린 아덴과 페로포네소스 동맹을 거느린 스파르타와, 헬라 세계를 양분한 장기 내전으로 되었다. 이동안 아덴에서는 악질(惡疾)의 유행으로 펠리크레스를 잃은 후 선동정치가에 조종되어 작전을 그르쳐 시실리 원정에 실패, 스파르타군의 연년의 침입에의해 국토는 황폐화되고, 데로스 동맹 제시(諸市)도 차례로 떨어져 나갔다. 스파르타도 바사의 자금으로 해군을 설치하고 아이고스포파모이 전에서 아덴을 격파하고(BC 405) 흑해 방면으로부터의 보급로를 차단했으므로, 이듬해 마침내 아덴은 굴복하였다.아덴에 대신한 스파르타의 패권도 곧 중부 헬라의 더베에게 빼앗겼으나, 더베의 세력도 오래 계속되지 못하였다. 폴리스 내와 폴리스 간의 분립 항쟁은 만성 상태로 되고, 국토는 가일층 황폐화하고, 화폐 경제의 진전과 아울러 폴리스 사회의 빈부 차는 증대하고, 중무장 시민단의 유지는 곤란하게 되었고, 이에 대신하여 경무장의 용병(傭兵) 사용이 성행하게 되었다. 용병은 그 목적을 불문하고 급료를 지불하는 자를 위해 싸웠으므로, 폴리스 사회의 존립을 근저로부터 흔들어 놓는 것이 되었다. 이 때 북방에서 마게도냐가 일어나 헬라에 육박하였다.
 
12. BC 4세기의 문화: BC 4세기 폴리스 사회의 분위기는 문화의 양상에도 심각한 영향을미쳤다. 철학에는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BC 427-347),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가 연이어 나왔다. 플라톤이 `경험적 사물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참실재로서의 이데아(ijdeva)의 관조(觀照)'를 논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를 비판하여 `개물(個物)에 내재하는 우시아(oujsiva)'를 논하고, 내용에서 `형상(形像)으로의 목적론적 발전'을 진술하여 유럽의 관념론적 철학의 2대 조류를 형성했지만, 양자공히 폴리스 쇠퇴기에 있어서 여전히 폴리스의 전통에 서는 철학이며, 동시에 현실 폴리스의 결함을 극복하여 이상의 폴리스를 재건하려고 하는 구상이 국가론으로서 제시되었다.아덴의 파르테논 신전플라톤의 초기작 `국가'(Politeiva)에서 물질적 생산에종사하는 서민을 제외하고, 통치자와 군인의 두 신분 부인, 그리고 재산의 공유를 규정하고, 후기의 작 `법률'(Novmoi)에서는 시민이 가족과 일정한 토지나 노예를 가지는 것을 허용했으나, 법에 근거한 국가적 통제와 교육적 의의를 주장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다한 폴리스의 제도사적 연구에 근거하여 폴리스를 시민을 잘 살리기 위한 공동체라고 정의하고, 정체는 군주정체, 귀족정체, 민주정체의 어느 것으로라도 운용만 바르면 된다면서, 노예제를 극력 옹호하고, 자유인과 노예와는 헬라인과 바르바로이(미개인,bavrbaroi)처럼 선천적으로 우열을 인정한다는 전통적 입장을 고집하였다.이 폴리스 주류의 철학에 대하여 소(小) 소크라테스로 총칭되는 큐레네파, 큐니코스파는 각각 쾌락과 금욕을 주장하는 개인 윤리적 성격을 띠었으나, 소피스트의 영향도 받아들여 폴리스적 생활에 배치되는 경향을 보임으로써 오히려 헬레니즘 시대의 선구적역할을 하였다. 그 밖에, 사학에 크세노폰(Xenophon, BC 430 경-345), 변론˙수사학에 이소크라테스(Isocrates, BC 436-338)와 데모스데네스(Demosthenes, BC 384-322)가 나타났고, 조각에는 프락시텔레스(Praxiteles, BC 390?-330?)와 스코파스(Scopas, BC 420-340), 그리고 리십포스(Lysippos)가 나와 신들의 상(像)도 점차 인간화되고, 인간상도 이상보다 사실(寫實)이 중시되었다.

 

 

 

헬레니즘
 
1. 알렉산더 대왕의 업적: BC 4세기의 헬라 세계가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 스스로 위기를타개하는 방법을 몰랐을 적에 북방에서 마게도냐가 일어났다. 그 왕 필립포스 II세(Philippos II, BC 359-336 재위)는 국력을 축적하여 헬라 문화도 도입하고, 헬라 제시(諸市)의 항쟁을 틈타 진공하여 아덴˙더베 연합군을 카이로네이아 전에서 격파(BC 338), 헬라의 독립과 자유는 여기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필립포스는 스파르타를 제외한 전 헬라의 동맹(고린도 동맹)을 조직하여 그 지도권을 장악, 다시 바사 원정을계획했으나, 이듬해 마게도냐에서 암살되었다.그 아들 알렉산더 III세(Alexnder III, 대왕, BC 356-323, 재위 BC 336-323)는 부왕의뜻을 이어 BC 334년 바사 원정에 참전, 소아시아에서 바사군에 연전 연승하여 수리아와 팔레스틴을 거쳐 애굽으로 내려가 나일 하구에 알렉산드리아 시를 건설하고, 리비아 사막 시와의 오아시스에 있는 아몬 신전에 참배, `신의 아들'이라고 부른 다음, 아시아 내지로 진군하여 아르베라전에서 바사 왕 다리오 III세를 격파하고 마침내 바사를멸하였다(BC 330). 그는 다시 동진하여 중앙 아시아를 거쳐 서북 인도로 들어간 후 군을 돌이켜 바벨론으로 개선(BC 324), 이 곳을 신제국의 수도로 삼았다.그는 이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하여 오리엔트 각지에 도시를 건설하여 헬라인을식민하여 헬라 문화의 이식과 전파를 꾀하였고, 또 동서의 민족 융합을 위해 부하 장병을 이란 여자와 결혼시켰다. 그리고 자신도 바사 왕가의 여자를 취하였다. 다시 지방 행정관이나 군대에 이란인을 채용, 오리엔트의 전제 군주로서의 전통을 계승하여바사 조정의 의례(儀禮)를 채용하고, 마게도냐 귀족에게까지 궤예배(proskuvnhsi", 무릎을 꿇어 엎드려 드리는 예배)를 요구했으므로 공신이나 장병의 이탈(離脫)을 초래했다. 더구나 그가 BC 323년 열병으로 급사하여 적당한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였기 때문에, 대제국은 순식간에 와해했으나, 오리엔트와 헬라를 하나의 경제˙문화권으로 하는 헬레니즘 세계의 성립과 발전으로의 길을 텄다.
 
2. 헬레니즘 제국: 알렉산더의 사후, 그 부장(部將)들은 제각기 자신을 `후계자'라 칭하여 수 십 년에 이르는 항쟁 결과 안티고노스가(Antigonus家)가 마게도냐를, 셀레우코스 왕조(Seleucid Dynasty)가 수리아와 그 동방의 유령(遺領)을, 톨레마이오스 왕조(Ptolemaic Dynasty)가 애굽을 영유하게 되었다. 이들 헬레니즘 제국은 고전 헬라의 폴리스와는 다른 영역 국가였으며, 마게도냐가 민족 국가이고 가부장제적 왕정을 존속한데 대하여, 애굽과 수리아는 마게도냐인과 헬라인을 지배층으로 하고 오리엔트의 원주민을 지배하는 전제국가였다.경제의 번영은 오리엔트로 옮겨지고, 애굽의 알렉산드리아, 수리아의 안디옥, 메소보다미아의 실루기아(Seleucia)가 수 십 만의 인구를 헤아리는 대도시로 발전하고, 이에대하여 헬라는 고린도와 에게해의 로도와 델로스(Delos) 양 섬을 제외하고는 쇠퇴하여인구도 감소하여, 겨우 아에트리아와 아가야 양 도시 동맹을 맺어 자위를 꾀하였다.곧 오리엔트에 있어서도 광대한 수리아 왕국 영에서 BC 3세기 동안에 바대, 박트리아(Bactria), 버가모의 세 왕국이 자립하여 BC 2세기 반에는 유대인이 마카비아가(家)지도하에 과감한 항쟁 후 독립하였고, 마카비가는 하스몬가를 수립, 왕과 대제사장을겸했다. 그러나 이들 헬레니즘 제국도 동방의 바대와 박트리아를 제외하고는 연이어로마의 지배하에 놓여지게 되었다.
 
3. 헬레니즘 문화: 헬레니즘 문화는 고전 헬라 문화와 달라 폴리스와 민족을 초월한 코스모폴리탄적인 특색을 보이고 있다. 또, 철학에서는 구브로 사람 제논(Zenon, BC 335-263)이 창설한 스토아파와, 아덴의 에피쿠로스(Epikuros, BC 342-271)가 수립한학파가 일어나 각각 전대의 큐니코스파와 큐레네파의 사상 경향을 새 시대 환경에 맞추어 발전시켰다. 스토아파는 극기와 금욕을 역설하고, 에피쿠로스파는 쾌락을 중시했으나, 현재의 이상을 내걸고 외계의 사물에 요동되지 않는 내심의 평정을 구하고, 폴리스 생활의 가치를 경시하며, 개인의 행복에 마음을 두는 동시에 세계 시민 주의의경향을 띤 점에서 선악 진위의 `판단 중지'를 제창하고, 피론(Prrhon)이 시작한 회의파와도 공통되고 있었다.다만 스토아의 사상에 포함된 자연법이나, 세계 각국의 이념은 중기 스토아파의 파나이피오스(Panaitios, BC 180 경-110)에 의해 로마에 전해져 즉시 로마의 국가관이나로마법에 영향을 주었다. 중기 스토아의 대표적 사상가는 포세이도니오스(Poseidonios, BC 135 경-51)인데, 스토아를 근간으로 하여 헬라, 오리엔트 제사상을 융합했다.후기 스토아파의 담당자들은 로마로 가고, 세네카(Seneca, BC 4 경-AD 65), 에픽테토스(Epictetos, AD 55 경-135 경),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D 161-180 재위) 등 사회 각층에 미쳐 실천 윤리적 경향과 종교적 색채를 더하였다. 고대 말기에 스토아는 쇠퇴하고 이에 대신하여 만물의 근원인 `일자(一者)'와의 탈아적 합일(脫我的 合一)을 주창하는 종교적, 신비적 성격이 농후한 신플라톤 철학이 플로티노스(Plotinos, 205 경-270 경)에 의해 체계가 세워져 그 시대를 풍미하고, 그 사상적 감화는 이교 뿐만 아니라 대립적 입장에 있는 기독교에도 미쳤다.그러나 민중은 철학보다도 가까이 하기 쉬운 종교에 위안을 구했다. 그 종교는 폴리스의 독립이 상실되었기 때문에, 그 공적 종교의 성격이 강한 올림포스 신들의 예배가쇠퇴하고 심한 변동 시대를 만나 `운명의 여신'(Tuvch)이나 군주 예배가 성하게 되었다. 또, 애굽의 이시스교, 바사의 미도라교를 비롯하여 오리엔트의 밀의종교(密儀宗敎)가 유입되어 헬라 재래의 종교와의 절충이 일어나고, 갈대아의 점성술도 전래되었다.동시에, 지리적 시야의 확대를 배경으로 하여 자연과학이 커다란 발전을 이룩하였다.특히 알렉산드리아가 그 중심으로 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원 류케이온을 본 따 규모를 확충한 왕립 연구소(Mousei'on) 대도서관에 수다한 학자가 소집되어 연구에 종사, 제과학 분화와 발전이 촉진되었다. 지구의 원주(圓周)를 측정한 에라토스데네스(Eratosthenes, BC 275 경-194), 태양 중심설을 주장한 아리스타르코스(Aristarchos, BC 310년 경-230 경), 고대 천문학의 최고봉을 보인 힙파르코스(Hipparchos,BC 160-125), 평면 기하학을 대성한 유클리드(Euclid, BC 300 경), 물리학과 그 응용기술에 많은 업적을 올린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BC 287 경-212), 의학의 헤로필로스(Herophilos, BC 100 경) 등이 대표적인 학자이다.그러나 이 자연과학의 발달도 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보호에 의존하는 학자들의 전문적인 일에 그치고, 일반 민중에 대한 지식의 계몽과 보급이 행해지지 않고, 과학의 성과를 널리 응용하여 기술을 발명하여 인력을 절약하는 연구도 노예적 노동력의 풍부한당시에는 중시되지 않고, 또 밀의종교나 점성술이 과학적˙합리적 사고에 우위하였던것 등 때문에 곧 침체해 버렸다.알렉산드리아에서는 또 셉투아긴타(Septuaginta, 70인역)가 성립되고, 호메로스의 텍스트 교정, 주석 연구 등의 문헌학이 일어났으나, 순 문학은 부진하여 겨우 메난드로스(Menandros, BC 342-291)의 새 희극과 헤론다스(Herondas, BC 3세기의 사람)의 희곡, 그리고 데오크리토스(Theocritos, BC 3세기 초의 사람)의 전원시가 천신한 숨을내뿜었는데 불과했다.미술에서는 조화와 균형보다도 `사모트라케의 니케' `라오콘' 따위의 조각품으로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육체나 정신의 심한 움직임이 표현되었고, 또 미로의 `비너스'를비롯하여 많은 아프로디테(Aphrodite, 사랑, 연애, 미의 여신:

 

 

 

 

 

 

 

 

 

헬라어(~語) : Greek Language

 

[영] Greek Language 그리스어 형용사 [헬레-니코스 @Ellhniko"(Hellenikos)](계 9:11), 부사 [헬레-니스티 @Ellhnisti(Hellenisti)](행 21:37,요 19:20)의 역어.

 

 이것은 신약시대의 지중해 세계에서 일반적으로 씌어진 그리스어를 가리킨다. 유대인으로 그리스어를 말한다는 것은 극단의 국수주의자가 아닌 것으로 판단하는 실마리가 되었다(행 21:37). [헬라파 유대인]으로 역된 말은 [헬레-니스테-스 @Ellhnisth"(Hellenistes)]인데, [헬레나이즈 된 자] 즉 [그리스의 관습의 영향을 받은 자]를 의미하고, 이런 유의 유대인을 가리켜 한글 개역은 설명적인 역어[유대파 유대인]으로 부르고 있다(Hellenist, 행 6:1, 9:29). 그리스어는 산스크리트 및 근대 유럽어의 대부분과 한가지로,같은 어족의 언어이다. 여러 가지의 방언 중 앗티카 방언(Attic, 아테네의 방언)이 전4세기에는 문학적 용어로서 지배적이 되었다. 2세기 말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에 의해 널리 지중해 세계에 그리스어가 보급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코이네(koinh 공통이라는 뜻)로 불리웠는데, 당시 일종의 국제어( lingua franca)로 된 그리스어로서 이른바 [헬라니스틱, 그리스어](Hellenisti Greek)이다. 이것은 앗티카 즉 고전 그리스어에 기초해 있는데, 다른 방언의 요소도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계속되는 세기 동안에도 커다란 변화를 받는 일이 거의 없었고, 로마제국 내에서는 도처에서 일상어로서 씌어졌다. 신약시대에 기록된 파피리는, 신약성서가 이 [코이네-], 즉 일상어로서의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분명히 했다. 신약시대에는 팔레스티나 땅 밖에서 태어난 디아스포라의 유대인에게는, 이 코이네-가 모국어로 되어 있었다. 본국에서 태어난 유대인은 외국인과 사귀는 때에는 헬라어를 썼는데, 그들 자신들 사이에서는 아람어를 썼다.

 

 

 

헬라인(~人):Greeks(인명)

 

[영] Greeks 그리스에서 태어난 사람, 또는 그리스 민족에 속한 사람들.

 

 구약에서는, 욜 3:6에서 [베네 하이예와-님 !yniw;Y]h' yneB](bebe hayyewanim)] [헬라 족속]으로 역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오니아인(→)을 가리키고 있다. 신약에서는 주로 [헬렌- @Ellhn](hellen) [헬라인]으로 역되어 있고(요 7:35,행11:20,14:1기타),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수호신 [헬렌]의 이름 따라 스스로를 [헬레-네스 @Ellhne"]라 불렀다. 신약에서 유대인과 그리스인(헬라인)이 대조적으로 말해지는 경우, 그리스인은 이방인 일반을 나타내는 것으로 씌어져 있다(롬 1:14,16,10:12).

 

 

 

헬라파  유대인들:Hellenists

 

[그] @Ellhnisth"(hellenistes)

 

[영] Hellenists [헬레나이즈화 된 자], 즉 [그리스의 관습의 영향을 받은 자]를 의미하고, 이런 유의 유대인을 가리켜 한글역은 설명적인 역어 [헬라파 유대인들]이라고 하고 있다(Hellenist, 행 6:1,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