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עמּנוּאל)  

 

 

'임마누엘'은 '함께'(with)라는 뜻의 히브리어 '임'(עם)과 '우리와'(us)라는 뜻의 '마누'(נו), '하나님'(God)이란 뜻의 '엘'(אֵ֣ל)이 결합된 형태로 '하나님은 우리들과 함께 하신다'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 임마누엘 족장에게
'임마누엘'이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서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부터 당신의 백성과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다.

*창 26:3-4/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 하나님의 동행과 임재를 약속하신 말이다. 선민 이스라엘과 항상 함께 하신 하나님은 후에 성막과 성전의 지성소에 거하셨으나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 약속은 완전히 성취되었다(요 1:14). 예수의 이름인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란 말은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마 1:23).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네게 복을 주고" -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약속하신 복은 이미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22:16-18)의 재확인이자 계승으로 그 핵심은 자손과 땅에 대한 축복이다. 이후 이러한 약속은 야곱에게도 주어졌으며(28:15) 부분적, 일시적으로나마 이스라엘 역사속에서 성취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영적 축복으로, 그 궁극적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어 질 것이란 점이다. 오늘날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이제 이러한 축복을 온전히 누리는 자들이라 하겠는데 그 증거는 다음과 같다. (1)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칭함 받고 있다는점(롬 8:15,16) (2) 성령이 그들 가운데 내주(內主)하신다는 점(갈 2:20) (3) 영원한 생명과 천국을 보장받고 있다는 점(요 3:16; 5:3,10) 등이다.


• 임마누엘 이사야에게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줄 알 때에 미쳐 뻐터와 꿀을 먹을 것이라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줄 알기 전에 너의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폐한바 되리라"(사 7:14-16)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문자적으로는 '그녀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른다'이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경우가 적지 않았으나(창 29:32-35;30:6-13;35: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외적인 관습으로 보인다(창 16:15;삼하 12:24;눅 1:62,63등). 그러나 누가 아이의 이름을 짓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마 1:23에서는 본문의 주어가 3인칭 복수형(그들)으로 인용되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는 뜻이다. 일차적으로 그 이름은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이 그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을 의미한다.


이 예언은 북이스라엘과 아랍의 동맹군이 침략해 올 때를 배경으로 한다. 이때 여호와틀 떠나 이방 앗수르에게 도움을 구하는 유다 왕 아하스에게 선지자 이사야가 책망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그에게 '징조'를 주실 것이라 예언하는 장면이다. 이사야의 기록을 보면 베가와 르신은 다브엘의 아들을 유다의 왕위에 앉혀서 유다를 자신들의 동맹에 가담시키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일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는데 이 사건 때문에 이사야 선지자는 르신과 베가를 저주했던 것이다(사 7:7-9).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믿음에 대한 예언이 주어졌던 것이다(사 7:10-14).

임마누엘의 첫번째 예언의 성취는 르신-베가의 멸망으로 성취될 것이다. 그런데 이 아이가 구체적으로 누구이며 또 그의 어머니인 '처녀'(알마)는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해 예로부터 학자들 간에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1)그 어머니는 동정녀 마리아이며 그 아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주장(E.J.Young, Alexander, Hengstenberg)

이것은 아이의 성장과 아하스 당대의 정치적 상황 사이의 역사적 관련성을 기술하고 있는 15-17절로 인해 수용하기 어렵다. 이러한 난점을 피하기 위해서는 본절의 아이와 15,16절의 아이를 구분하거나(박윤선), 혹은 본절과 15절의 아이와 16절의 아이를 각각 다른 인물로 구분할 수밖에 없는데(Bultema, Calvin), 이 경우에 해석의 자의성이 문제가 될 것이다. 따라서 마 1:23에 의거, 본문이 메시야적 예언임에 틀림없다고 할지라도 시공간적 거리를 무시하고 직접적으로 아기 예수와 그 모친 마리아에게만 적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2)그 어머니는 아하스 왕의 왕비 혹은 후궁을 가리키며, 그 아이는 히스기야를 가리킨다는 주장. 이는 주로 유태계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연대기적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B.C.728년 히스기야가 왕위에 올랐을 때 그의 나이 이미 25세였으므로, 선지자가 이 예언을 할 당시에는 10대의 소년이었던 것이다(대하 29:1).

(3)그 어머니는 이사야 선지자의 아내이며 그 아이는 선지자의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주장(Clements). 이 경우에 선지자가 8:3에서처럼 '선지자의 아내' 혹은 '여선지자'(하네비아)라고 명확하게 표현하지 않고 굳이 '알마'라는 모호한 말로 대신하였는가가 의심스럽다. 게다가 그의 아내처럼 오래도록 결혼 생활을 한 여자를 '알마'라고 부를 수 있을까도 수긍하기 힘들다.

(4)선지자가 특정인을 가리키지 않고 일반적으로 당시 유다에 살고 있던 어머니들을 가리킨다는 주장. 이사야의 예언 당시 처녀였던 한 젊은 여인이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아이가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아이가 되기 전에 아하스가 그의 원수들로부터 해방될 것을 말한다.

(5) 임마누엘은 유다에 남아 있던 의(義)로운 자들로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자들을 암시하는 것이고, 임마누엘을 낳은 젊은 여인은 시온이다. 이 경우에 정관사 '하'가 문제가 될 것이다. 이상의 어떤 주장도 그 자체로 완전하지 않다. 다만 이제까지 주어진 여러 증거들을 종합해볼 때, 우선 징조로서의 이 아이는 아하스 당대에 적용되어야 한다. 이는 그 아이의 성장 기한과 르신-베가 동맹군의 몰락이 결부되어 있다는 15,16절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또한 이 징조는 아하스 당대에만 국한될 수 없다.

그것이 다윗의 집에 주어졌고, 더욱이 이 임마누엘의 위로가 앗수르의 위협과 더불어 소멸되리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더 큰 역사적 지평으로 확대된다. 선지자의 예언이 궁극적인 결실을 보게 되는 것은 그 인격 속에 임마누엘의 약속과 구원을 구현할 메시야의 탄생에서이다.

아사야 7:1-9:7은 한 단위이며, 7:14은 그 가운데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으로서 임마누엘의 탄생은 '미래에의 확증'이라는 해석이다. 즉 예언된 임마누엘(7:14)은 결국 유다 땅을 소유하게 될것이며(8:8), 그의 모든 원수들의 계획을 좌절시키며(8:10),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빛이 되시기 위해(9:2) 이방의 갈릴리(9:1)에 나타나실 것이다. 이 임마누엘은 한 아기요 한 아들이며, 그 이름은"기묘자(奇妙者)요, 모사(謀事)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9:6)으로서 다윗의 위(位)에 앉아 나라를 굳게 세우고 영원토륵 공평(impartiality)과 정의(justice)로 왕국을 보존하실 것이다(9:7).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창일하고 목에까지 미치리라 임마누엘이여 그의 펴는 날개가 네 땅에 편만하리라 하셨느니라"(사 8:8)

"임마누엘이여"- 히브리어 원문에는 이 말이 문장 맨 뒤에 놓여 있다. 선지자의 눈은 다시 임마누엘이라 불리는 한 아이에게 향한다. 이는 범람하는 물결이 거의 목에 차고 새의 편 날개가 온 땅을 덮는 것처럼, 유다 전역이 물에 잠긴 듯한 위급한 상황 속에서 유일한 구원의 희망이란 오직 그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이 소망스러운 이름을 기점으로 하여 선지자의 어조와 전망은 일변한다. 비록 가까운 장래에 적들로부터 주어질 재난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인 승리와 구원은 이 땅 위에 임할 것이다. 명령법과 반복법으로 이루어진 본문은 임마누엘이 주는 위로와 보호를 말하고 있다. 그 요지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백성들을 세상의 나라들이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너희 민족들아 훤화하라 필경 패망하리라 너희 먼 나라 백성들아 들을지니라 너희 허리를 동이라 필경 패망하리라 너희 허리에 띠를 띠라 필경 패망하리라"(사 8:9)

여기서 '민족들'은 앗수르인들을 위시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적대하는 모든 민족들을 가리킨다. '훤화하다'는 '격노하다', '시끄럽게 날뛰다', '제멋대로 날뛰다'는 뜻으로 전쟁의 함성을 말한다. 격동하고 허리를 동이며 모략을 짜내는 등 저들이 온갖 수고와 준비를 아끼지 않을지라도 그 승부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뭇 세력들에게 주어질 궁극적인 운명은 패망뿐이다. 저들이 필경, 궁극적으로 패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 백성과 함께하신다"는, 이 놀라운'임마누엘'의 선언 때문이다. 여기서 임마누엘은 칭호로 쓰이지 않고 선언적인 진술로 사용되었다.명령법과 반복법으로 이루어진 본문은 임마누엘이 주는 위로와 보호를 말하고 있다. 그 요지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백성들을 세상의 나라들이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 예수, 임마누엘의 성취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의 이름을 ‘예수’ 라고 불러라." ... 이 모든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은 하나님이 예언자를 통해서 말씀하신 예언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처녀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 이라 부를 것이다.”(마 1:21‭-‬23)

마태는 이사야 예언의(사 7:14)의 70인역(LXX)에 따른 인용이다.

'임마누엘'은 '함께'(with)라는 뜻의 히브리어 '임'과, '우리와'(us)라는 뜻의 '마누', '하나님'(God)이란 뜻의 '엘'이 결합된 형태로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메시야와 예수가 되실 뿐 아니라 그분이 곧 죄악으로 인해 절망가운데 있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이땅에 내림(來臨)하신 하나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God with us)분이심을 강조한 호칭이다. 실로 죄로 인해 원수되었던 하나님과 인간들을 화해시키기 위해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어 주실(요일 4:10) 중보자(中保者)이신 예수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다가(요 1:14)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항상 함께 계시는(마 28:20) 영원한 하나님 그자체 이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죄사함을 받고 그분의 실존(existence)을 날마다 인정하는 백성들은(21절) 모두가 하나님과 더불어 살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