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란 무엇인가?


‘선교’라는 말은 성경에 없는 용어이다. 선교는 라틴어 동사 mitteer(보내다. 파견하다)라는 단어를 어원으로 하고 있다. 영어로 선교를 의미하는 mission은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고 파송되는 것을 뜻한다. 영어의 mission(선교)와 missionary(선교사)는 라틴어 mitto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 의미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선교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대속의 은혜를 알지 못하여 아직도 그를 주와 구주로 인정하지 않는 모든 족속들로 하여금 믿어 순종케 하려고 문화적인 경계를 넘어 가서 택하신 자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불러들이는 활동을 말한다. 그리고 선교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여러 가지 사업들과 활동들을 할 수 있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어야 한다.
조지 W. 피터스는 “선교란 복음의 불모지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고, 다른 종교를 가지거나 전혀 신앙이 없는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그리고 그 지역과 그 나라에서 기독교 신앙의 열매를 낳을 살아있고 능력 있는 지역교회를 세우기 위해 자격을 인정받은 사람들을 신약성경의 교회와 그 직접적인 영향권을 벗어난 지경으로 보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선교란 넒은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행위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구체적이고 좁은 의미에서 타 문화권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대속의 은혜를 믿게 하여 지역교회를 세우는 사역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왜 선교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다 주지하고 있는 바이다. 그것은 선교를 통해 세계각처에 있는 모든 족속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딤전 2:4)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며(눅 19:10), 주님이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명령(마 28:19-20, 행 1:8)이고 은혜 받은 자들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제자들로 시작하여 2천년 동안 주님께 헌신한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의 복음을 전하고자 국경과 민족을 초월하여 세계 각처로 나아갔던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교회에 주신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어떤 그리스도인은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신약교회의 원리를 따르지 않는 교회이다.” 또는 “교회의 존재 가치가 정당화 될 수 있는 길은 교회가 선교의 책임을 이룩하는 것밖에 없다.”라고까지 말했다.
선교사역은 교회에 부탁한 주님의 명령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주님의 재림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복스러운 소망이며 그리스도의 최종적인 승리의 날로 그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바칠 때이며 교회는 위임받은 선교과업이 최종적으로 완결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온 세상(동일 문화권 및 타 문화권)에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만일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누가 전할 것인가?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고 명령하셨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그러나 선교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서 외부적으로 많은 방해를 받아 왔으며 내부적으로도 많은 장애요소를 가지고 있다. 선교에 있어서 우리가 극복해야할 내부적인 장애요소들은 무엇인가? 선교에 대한 장애요소들이 많이 있으리라고 생각되나 필자는 개인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일곱 가지만 논하고자 한다.

첫째, 선교에 대한 무관심이 선교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예루살렘의 제자들이 사마리아인들이나 이방인들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민족주의적 우월감에 의해서 제 3세계의 가난하고 소외된 민족에 대한 편견이나, 교만이 선교에 대한 무관심을 가져오기도 하고, 아직 국내의 상황을 생각하여 시기상조라는 견해와 우리가 아니라도 서구의 선진 기독교 국가에서나 해야 할 일쯤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선교에 대한 책임감의 결여가 내부적인 장애요소라고 본다.

둘째, 선교에 대한 관심은 어느 정도 있으나 선교에 자신을 드리기를 주저하는 인색함이나 두려움을 들 수 있다. 오늘날 우리(한국교회)는 세계선교라는 역사의 흐름에 편승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개인적이든 교회적이든 선교에 대한 관심을 한번쯤은 갖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에 대해서는 아직도 두려운 마음을 갖거나 동참하는데 인색한 형편이다. 현재 우리가 극복해야 할 중요한 장애요소인 것이다.

셋째, 선교에 대한 관심과 열의는 있으나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교회를 세우기보다 자신의 교회를 세우려는 이기심이 선교의 장애이다.
현재 세계 각처에 한국에서 파송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한국 기독교의 선교사 파송은 절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한국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는 성경의 교회라기 보다 교단교회를 이루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 모임의 역할이 선교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때이다. 인간의 영향을 받는 교회가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져야만 한다.
이기심의 극복(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동일한 선교지에 있는 선교사들에 있어서도 서로 아름다운 동역을 이루어 낼 것이다.

넷째, 선교사에 대한 이해 및 훈련 부족이 선교의 장애 요소라고 생각한다. 선교사는 한 나라에 교회의 기초를 세우는 사람이다. 선교사의 자질에 따라 선교지의 교회는 크게 좌우된다. 그러므로 선교사는 복음에 대한 열정과 은사는 물론이고 말씀에 대한 분별 및 순종의 본이 되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는 젊은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인식되기도 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이라는 말로 전혀 훈련되지 않은 사람이 파송되는 경우도 있다. 선교사는 파송된 나라에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교회가 무엇인지 그 모델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에 충분한 훈련과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파송하기 전에 지역교회에서 선교사에 대한 검증이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다섯째, 선교사역의 결과를 빨리 얻고자 하는 조급함이 선교의 장애요소 중에 하나일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은 말로만 되어지는 것도 아니요 돈으로만 되어지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선교사들의 끊임없는 사랑과 섬김을 통해서 드러내야만 하는 것이다. 이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될 것이다. 그러나 선교의 결과를 속히 보려는 선교사들의 조급함은 물량공세로 사람을 모은다든지 쉽게 사람들을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위험이 있는 것이다. 또한 선교사의 조급함은 선교지의 성도들이 영적으로 빨리 성숙되기를 기대하나 기대에 못 미칠 경우 무례한 행동을 하게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파송교회 역시 무리한 결과를 기대 함으로 선교사에게 큰 부담을 줄 수가 있는 것이다. 조급함으로 부실한 교회를 세우기 보다 비록 조금은 느릴지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세워져만 할 것이다.

여섯째, 선교는 특별한 사람, 특별한 교회만이 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연합의 실패를 야기하는 것은 개인주의가 팽배해 가는 오늘날에 우리가 극복해야 할 선교의 장애이다. 선교는 헌신된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선교의 일은 선교사 한 사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선교지에는 본국과는 전혀 다른 정치, 경제, 문화적인 차이와 자연조건의 차이가 있어 복음을 전하는데 많은 외부적 장애요소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곳이다. 그러므로 많은 부분에 본국 교회와 성도들의 후원이 필요한 것이다.
복음을 전하기에 앞서 현지에서 생존해야만 하는 기초적인 생활문제는 물론하고 선교활동에 필요한 자금은 필수 불가결한 문제이다. 사실 어떤 면에서 선교는 돈과 직결된 문제이다. 자금력이 강한 교단일수록 더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필요를 선교사 개인이나 파송한 지역교회만의 몫으로 미룰 수는 없는 것이다. 선교는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몫이요 책임이어야 하며 기도와 헌신으로 연합을 이루어 주님이 기뻐하시는 선교가 되도록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선교의 장애에 있어서 성령님의 다양성에 대한 이해 부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선교의 역사는 무려 2천년 동안 성령님의 역사하심 가운데 이루어져왔다. 시대적으로 역사적으로 많은 변화의 물결을 타고 복음이 전해져 온 것이다. 초대교회의 선교 방법이 오늘날에 동일하게 적용되어질 수 없다. 목적은 같아도 방법에 있어서는 다양한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방법이나 허드슨 테일러의 방식 또는 어떤 특정인의 선교 방법만이 유일한 선교 방법으로 주장하거나 선교의 모델처럼 인식하는 것은 선교에 있어서 부정적인 생각을 낳게 하는 장애요소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앞서간 선배들의 선교방법은 후배들이 배워야 할 좋은 선교방법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제한된 틀에 성령님의 다양한 역사를 제한하려고 하는 생각은 다양한 방법으로 역사 하시는 성령님에 대한 이해 부족이요, 선교의 장애요소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선교의 많은 장애요소들을 극복하고 이 시대에 우리에게 부여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다 함께 힘차게 일어나야만 된다.
예수님께서도 가르치심과 행하심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 하셨다. 사도들과 제자들 또한 주님의 본과 명령을 따라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증거 하는 일에 죽기까지 헌신하였다. 역사적으로 앞서간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피를 흘리면서 전한 복음증거의 결과로 오늘날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나라의 큰 은총을 입었고, 이 복음에 대해 빚을 진자들이다(롬 1:14). 이제 우리 앞에 주어진 선교의 사명에 책임을 감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원한다.

‘말이 없는 행동은 명료성이 없으며, 행동이 따르지 않는 말은 신빙성이 없다’는 말이 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의 행하심을 이해할 수 있게 하였으며, 예수님의 행동은 그의 말씀에 대해 믿음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므로 교회의 선교 또한 예수님의 선교를 모델로 하여 말과 행함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 선교와 전도는 다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도도 말과 행동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고, 선교 또한 말과 행동으로 지구상의 모든 족속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다. 전도가 의미하며 목표하는 것을 떠나서는 선교라고 말할 수 없다. 전도가 아닌 선교는 진정한 선교가 아니며, 전도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의 본분을 상실한 교회이다.

끝으로 선교에 대한 생각이 ‘나 하나쯤’이란 열외 의식이 아니라 ‘나 하나만이라도’라는 적극적인 참여의식이 독자들에게 일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3-15)

이에 도날드 맥가브란의 말을 인용하며 마치고자 한다.

“선교란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영접하지 아니한 사람들에게 문화권을 초월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이며, 그들을 권하여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영접하며, 그의 몸인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전도와 정의의 실현에 참여케 함으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Donald A. McGavran)